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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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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름, 유신

등록 2015-10-20 18:33 수정 2020-05-03 04:28

그리 궁금하지 않을 개인정보 일부를 공개하자면, 나는 1972년 10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고민했다. 출생 열흘 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 초안을 선포했다. 태어나던 날, 개헌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됐다. “그래서 네 이름을 ‘유신’으로 지으려 했다”고 아버지는 나중에 말했다. ‘안유신’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그러잖아도 꼴통마초인 정체성에 화룡점정이 됐을 것이다.

여덟 살 생일 아침, 부모님은 라디오에 귀를 대고 있었다. 생일상 차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개를 떨구었다.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필 내 생일에 이런 일이 났을까, 풀 죽어 학교에 가니 선생님들이 울고 있었다. 몇 년 뒤, 온 식구가 구미의 박정희 생가를 찾아 참배했다. 소박한 초가집이 기억난다. 다시 몇 년 뒤, 아버지는 아들의 생일 선물로 박정희 전기를 건넸다. 빨간 양장본에 금박 제목의 책이었다.

“이 산에서 대통령 두 명 난다 카더라.” 성묘갈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박정희의 고향은 금오산 북쪽 구미이고, 아버지의 고향은 금오산 남쪽 칠곡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금오산 정기 받은 두 번째 대통령인지, 아니면 주인공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박정희가 태어난 산자락을 공유하게 된 것을 아버지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랬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맏아들을 낳을 때, 아버지 나이 스물넷이었다. 시골에서 자라 고학했고 일가를 건사했다. 그 시절을 박정희와 함께했다. 그에게 자신을 투사했다. 박정희는 가난과 혼란의 반대말, 즉 부유와 질서의 표상이었으며, ‘고난 극복’(하면 된다!)의 아이콘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전체주의 이념의 토양이다. 박정희만 생각하면 애틋해지는 마음과 김일성 동상 앞에서 눈물 흘리는 마음의 간극은 크지 않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펼치던 무렵, 김일성은 천리마운동을 벌였다. 주체사상은 천리마운동을 이념화한 것인데, 그것은 번영을 약속하는 위대한 지도자에게 절대 권력을 허용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역사는 인생의 총합이다. 한국전쟁 이후 피폐한 사회를 재건하여 남한을 능가하는 정치·경제력을 일군 1960년대의 북한을 겪은 이들 때문에 김일성 우상화가 가능했다. 오늘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즉 ‘박정희 복권’ 프로젝트는 고속성장의 1960~70년대를 겪은 한국의 60~70대들이 있어 가능하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부정하면서 늙어갈 용기를 지닌 이, 얼마나 될 것인가. ‘박정희 세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자신의 삶이 부정당했다고 여길 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그 집단의 기억을 국가 이념으로 바꾸겠다는, 지난 30년에 걸친 ‘북한화’ 전략의 정점이다. ‘반북’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북한을 따라밟는 길이다. 이대로라면 우리도 북한 주민들처럼, 옛 지도자 생각에 꺼이꺼이 울며 지내기를 강요당할 것이다.

박정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60~70대에게 한국 사회가 할 일이 있긴 하다. 그 상실감에 귀기울이면서 위로하고 상담해야 한다. 다만 그의 영웅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점은 말해야 한다. 역사가 인생의 총합이라면, 우리에겐 각자의 영웅이 있고, 그 영웅은 국가의 이름으로 단일화될 수 없으며, 각자의 영웅을 지니고 공존하는 게 민주주의라는 것을 일러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트라우마도 좀 풀어드려야 한다. 우리 모두 마음의 병이 있으므로 그게 흠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리면서,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부정할 순 없겠지만, 대통령으로서 그 아버지를 모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는 점을 조언해야 한다. 금오산 정기 받은 아버지는 끝내 그런 조언자를 곁에 두지 못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자식은 아버지처럼 살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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