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했던 나의 어느 날은 여름이었다. 가장 절망했던 날도 여름에 속해 있다. 기억은 덩어리져 있다. 즐거운 추억을 솎아내려다 슬픔을 들쑤시게 된다. 슬픔은 그 기원을 가리지 않고 서로 알아차리므로, 여기저기서 온갖 회한이 몰려든다. 그것에 질식당하지 않으려고, 장차 돌이켜 추억이 될 즐거운 일을 이 여름에 다시 도모한다.
그러니 여름은 극단의 계절이다. 행복과 절망, 열기와 습기, 노동과 휴식, 땀 흘리지 않고선 먹지 못하는 자와 쉬어가며 즐기는 자, 생명의 번성과 그 쇠약 등이 여름 한철에 덩어리져 엉켜 있다. 이것은 유희의 시기인 동시에 인내의 시절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여름은 그처럼 혼란스럽다. 삶의 의미를 지키려고 도모하는 모든 일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기막힌 사건이 여름 내내 계속된다.
이번호를 여름 특집으로 꾸몄다. 여름의 본성처럼 페이지마다 명과 암이 엇갈린다.
특집 ‘놀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는 소박하지만 유쾌하게 이 여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담았다. 또 다른 특집 ‘가난의 경로’(3회)에는 수많은 여름을 몸부림치며 살아온 이들의 삶이 담겨 있다. 표지이야기 ‘국정원 감청 욕망’은 서늘한 여름 이야기다. 그들이 무슨 짓을 벌였을지 상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이 가운데 진심으로 크게 다루고 싶었던 것은 ‘놀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딱 한 번이라도 세상 근심 내려놓고, 행복과 절망이 교차하는 여름을 견뎌내는, 돌이켜 추억이 될 즐거운 일을 그래도 도모하자는 기사를 펼쳐 보고 싶었다. 빈틈없는 불행으로부터 잠시 탈출하고 싶었다. ‘맥먹’(Mc Muck) 기사라도 쓰고 싶었다.
맥먹은 맥도널드와 머크레이커를 합친 단어다. 맥도널드는 값싸고 중독성 높은 패스트푸드를 대표한다. 머크레이커(muckracker)는 ‘갈퀴질하는 사람’이란 뜻인데, 특히 권력 부패와 사회 병증을 고발한 20세기 초반의 미국 기자들을 지칭한다. 서구의 탐사보도 기자들은 머크레이커의 후예를 자처한다. 맥먹은 그 명예를 흉내내는 수치다.
20세기 초반, 머크레이커들이 둥지를 튼 곳은 매거진이었다. 주요 신문의 선정보도를 반성한 기자들이 진지한 탐사보도를 위해 매거진에 모여들었다(그때나 지금이나 심층 탐사보도의 둥지는 매거진인 것이다). 미국 언론 역사가들은 1902년 10월 이 게재한, 도시 관료들의 부패와 추문을 폭로하는 기사 ‘세인트루이스의 얼룩진 날들’을 탐사보도의 효시로 꼽는다.
이후 100여 년 동안 탐사보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했지만, 그 성취만큼이나 오염됐다. 권력과 구조의 모순을 폭로하는 머크레이커의 정신은 고립된 반면, 말초를 자극하며 오락성을 지향하면서도 탐사보도를 감히 자처하는 맥먹이 확산됐다. 현란한 편집으로 현혹하거나 과장으로 겁주는 맥먹은 방송, 인터넷, 신문을 가리지 않고 넘쳐난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캐내는 일에는 분명 땀과 고역이 뒤따르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싸구려 추문 선정보도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런 기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인간 본성 때문이다. 절망과 행복이 뒤엉킨 현실에서 오직 즐거운 일만 돌아볼 수 있기를 우리 모두 희구한다. 탐사보도는 곧잘 외면받고 선정보도는 쉽게 회자된다. 은 그런 기사에 환호하는 시대를 버텨내야 한다.
그렇다고 표피와 선정에 치우칠 수는 없으니, 착하고 올바르며, 즐겁고 유쾌하여, 좋은 삶을 윤택하게 가꿔줄 기사를 써야 한다. 정말이지 이번호는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여름이어서 더욱 고통스러운 자들로부터 눈 돌릴 수 없었고, 눈 돌리지 않으려는 우리를 감시하는 정보기관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여름이 이토록 처연하게 지나간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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