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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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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이다

등록 2015-03-24 17:42 수정 2020-05-03 04:27

열서너 살 무렵, 일요일마다 어느 친구 집에 놀러갔다. 친구 부모님이 예배 보러 교회에 가면, 우리는 또 다른 경배를 위해 다락방에 올랐다. 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먼 나라 여자들의 비현실적 사진들을 보았다. 작은 창에서 떨어지는 햇빛은 그믐달처럼 희미했고, 코 밑 수염이 돋아나던 우리는 안개처럼 혼미했다.

그것이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잡지’(雜誌)다. 숨겨두고 숨어 읽어야 하는 것. 잡스러운 것. 예컨대 독일을 대표하는 잡지는 , 미국을 대표하는 잡지는 . 한국을 대표하는 잡지는? ! 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 메이지 초기인 1867년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가 발간된 뒤, ‘이것저것 섞어 만드는 간행물’이라는 뜻의 한자어가 한반도에 들어왔다. ‘(콘텐츠) 다양성’과 연결된 원래 뜻에 큰 잘못은 없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 한국의 잡지는 ‘다양한 오락물’을 담은 매체로 순치됐다. 잡지는 부잡스러운 간행물의 이름이 됐다.

그 이미지를 피하려고 꾀를 낸 이름이 월간지·주간지·시사지 등이다. 그 효용은 다했다. 주간지건 월간지건 매일 주요 콘텐츠를 인터넷·모바일에 게재한다. 시사를 다루기로는 신문·방송·인터넷이 매한가지다.

많은 나라에선 달리 부른다. 세계 최초의 잡지는 프랑스의 (1665)이다. ‘주르날’(저널)은 전문적·학술적 기록물의 이름이다. 영미에선 ‘매거진’이 등장했다. 영국의 (1731), 미국의 (1741)이 효시다. 아랍어 ‘마카진’은 차곡차곡 물건을 쌓아둔 창고다. 여기서 비롯한 매거진은 ‘지식 저장소’라는 뜻이다. 전문성·심층성의 ‘주르날’과 체계성·다양성의 ‘마카진’이 매거진의 피와 근육에 흐른다. 그 이름, 매거진에는 부끄러운 바가 없다.

20세기 초반까지 전국의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대중 언론은 매거진이 유일했다. 전국 신문이 등장하자, 매거진은 심층 뉴스로 차별화했다. 시사와 오락을 겸한 방송이 등장하자, 매거진은 분야별 특화 콘텐츠를 장착했다. (모든 매거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과 모바일이 신문·방송을 휩쓸어버리는 21세기에도 세계의 매거진들은 전문적·심층적 콘텐츠를 제공하며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질긴 생명력의 원천은 ‘책의 아날로지’에 있다. 역사 이래 수많은 매체가 명멸했지만, 오직 책은 문명의 시작과 끝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책은 깊이 몰입하는 개인적 미디어다. 휴대와 보관이 쉽다. 다양한 콘텐츠 가운데 취사선택할 수 있다. 노트북·태블릿PC·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는 책의 아날로지에 속해 있다. 반면 신문과 방송은 책의 아날로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불편하고 폭력적인 미디어다. 디지털 미디어의 정글에서 살아남아 번성할 언론매체는 매거진밖에 없다. 매거진은 심층성, 다양성, 이동성, 개인성, 보관성, 확장성, 변형성 등을 두루 갖췄다. 매거진은 디지털 미디어의 원형이며 미래다.

어리숙한 편집장이 오고, 좋은 기자들이 떠났다. 김성환, 박현정, 엄지원 기자가 로 옮겼다. 날마다 그들이 그리울 것이다. 전진식, 김선식, 김효실 기자가 합류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기자들이다. 그들과 함께 새 꼭지를 만들었다. ‘더 친절한 기자들의 뉴스 A/S’는 한겨레 디지털콘텐츠팀과의 합작이다. ‘기자도 모르는 언론 이야기’는 국내외 미디어의 심층 뉴스를 다룬다.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것이다. 차근차근 그러나 쉼없이 그러다 결정적으로 변신할 것이다. 매거진 의 미래를 머리로 비관하고 심장으로 낙관한다. 물론 대개의 정답은 심장에 있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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