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쿠바 관타나모 미군 해병대 기지에서 근무하던 산티아고 일병은 워싱턴의 군 고위 인사 등에게 ‘부대에서 비밀에 부쳐진 총기사고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부대 전출을 원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해온 그는 내부고발을 디딤돌 삼아 악몽 같던 관타나모 기지를 벗어나려 한 것이다. 바라던 대답 대신 보복이 돌아왔다. 상관인 제셉 대령은 도슨 상병과 다우니 일병에게 산티아고 일병을 대상으로 한 ‘코드레드’를 지시했다. 코드레드는 군율을 강화한다는 허울 아래 유지돼온 특수 기합이다. 불법이지만 미 해병대의 불문율이었다. 산티아고 일병은 코드레드 과정에서 죽었고, 제셉과 도슨, 다우니는 군사법정에 서야 했다. 셋 모두 ‘모범적인 미 해병’이었다. 이들은 유죄판결을 받지만 수긍하지 못한다. 제셉은 코드레드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다우니는 “우리가 뭘 잘못했죠?”라고 되묻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미국 영화 (A Few Good Men·1992년 개봉) 얘기다.
미 해병대에 코드레드가 있다면, ‘귀신 잡는’ 대한민국 해병대엔 ‘기수열외’가 있다. 특정 사병을 찍어 동료 대접을 하지 않고 폭행하거나 후임병이 선임병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의 왕따 만들기다. 7월4일 강화도 해병대 부대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은 해병의 불문율인 기수열외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체력이 약하거나 눈치가 모자란 ‘관심 사병’만 표적이 되는 건 아니다. 선임병과 후임병의 업무를 공평하게 나누려던 ㄱ하사 같은 ‘민주 해병’도 기수열외의 대상이었다. “미제 철조망은 썩어도 해병대 기수는 영원하다”는 ‘해병의 위계문화’를 거부한 자로 찍힌 것이다.
코드레드나 기수열외는 고립의 공포를 확산시켜 집단의 응집력을 높이고 치부를 가리려는 파쇼적 관습이다. 그런데도 ‘해병대 문화’라며 불문율로 굳어진 것은 ‘침묵의 카르텔’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코드레드와 기수열외에 가담한 이들이 중뿔나게 못된 사람들은 아니다. 대부분 ‘모범 해병’이고, 착한 아들·아버지일 것이다. 일찍이 해나 아렌트가 에서 입증했듯이, 악이 늘 ‘악마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군대가 아닌 일반 사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공동 운명에 대한 확신’이라는 유명한 인지과학 실험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네 개의 선이 있다. 기준선은 8cm, A는 10cm, B는 9cm, C는 7cm다. C선은 기준선보다 길이가 짧다. 그런데 실험자는 5명의 피실험자에게 “기준선이 A, B, C 모두보다 짧다고 답해달라”고 미리 부탁한다. 그 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여섯 번째 피실험자를 부른다. 5명은 각본대로 실험자의 질문에 “기준선이 A, B, C 모두보다 짧다”고 답한다. 실험자의 질문에 여섯 번째 피실험자는 뭐라 답할까? 많은 학자들이 세계를 돌며 30차례 실험을 해보니, 여섯 번째 피실험자가 “기준선이 A, B, C 모두보다 짧다”고 답한 확률이 60%가 넘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만장일치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생각을 강요하면 중압감을 느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침묵의 카르텔에 순응하는 건 아니다. 고난을 무릅쓰고 그 카르텔을 깨려는 이들이 있다. 내부공익신고자(내부고발자·Whistle-blower)가 대표적이다. 공익신고자는 사회의 소금이다. 사람은 소금이 없으면 죽는다. 내부공익신고자가 없으면, 사회는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진다. 소금이 인류 최초의 국가 전매품이었듯이, 공익신고자도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공익신고자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1990년 이후 대표적 공익신고 사례 전부를 한 달 넘게 추적 조사했다(표지이야기). 확인된 현실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비리로 고발당한 자는 떵떵거리며 사는데 정의를 세우려던 의인이 탄압받는 세상은, 친일파가 독립운동가의 목을 비틀던 일제강점기와 얼마나 다른가? 대한민국 정부는 책임을 방기했고, 사회는 의인의 고통을 외면했다. 통탄할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만약 당신의 동료가 공익신고자로 나선다면, 당신은 어찌할 텐가?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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