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사랑도 증오도 아닌

등록 2011-06-07 17:24 수정 2020-05-03 04:26

외교는 모순의 예술이다. 예컨대 외교관 협상 수칙 1번은 ‘상대를 믿지 말라’다. 그러나 수칙 2번은 ‘상대와 신뢰관계를 형성하라’다. 불신하되 신뢰하라니…. 논리적으로 모순이지만 실상이 그렇다. 외교 협상에서 상대의 선의만 믿다간 국가의 운명이 휘청일 수 있다. 그런데 상호 신뢰가 없으면 협상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외교 협상의 이런 내적 모순 탓에 훌륭한 외교관은 협상에서 완승을 추구하지 않는다. ‘51 대 49’면 충분하다. 불신과 신뢰의 길항 속에 상대의 이익을 배려하면서도 내 이익을 좀더 많이 관철하기. 외교관 협상 수칙 3번이다. 그러므로 좋은 외교는 ‘너의 손해가 나의 이익’이라는 ‘제로섬’(zero-sum)이 아니라 ‘너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라는 ‘포지티브 섬’(positive-sum) 게임을 추구한다. 이렇게 ‘이익의 균형’은 외교의 황금률이 된다. 가장 비싼 외교가 가장 값싼 전쟁보다 낫다는 격언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남북관계는 통상적인 국가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남북기본합의서 전문)다. 하여 남북관계에선 ‘외교 협상’이 아닌 ‘당국 간 교섭’이라 부른다. 하지만 여기에도 외교 협상의 수칙은 적용된다. 북한 헌법상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의 대변인이 6월1일 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공개한 남북 정상회담 추진 관련 비밀접촉 사태에 이 수칙을 대입해보자. 남북관계의 현주소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신뢰관계 형성 노력은 없고 불신만 가득하다. ‘이익의 균형’을 맞추려는 상호 배려는 사라지고 완승을 추구하는 일방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북쪽의 이번 비밀접촉 공개는 사실상 이명박 정부 시기 남북 당국 관계의 조종(弔鐘)이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 정상회담이나 고위급 당국회담은 기대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남북이 서로 죽일 듯 맞섰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기에도 비밀교섭이 있었다. 남북 당국은 비밀접촉 사실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적이 없다. 비밀유지는 비밀접촉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쪽이 이를 깼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북쪽의 의사결정 체계가 정상인지 의심스럽다. 잘잘못을 따지거나 한반도 정세에 끼칠 영향을 짚기 전에 생각할 게 있다. 남북관계가 갱도의 막장에 가로막혔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험악한 불신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한과 북한은 샴쌍둥이와 다르지 않다. 불편하다고, 밉다고 섣부르게 상대를 떼어놓으려 하다간 둘 다 죽는 수가 있다. 싫어도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다. 반공을 제1의 기치로 내걸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북한이 예뻐서 비밀접촉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일을 원하지 않더라도, 북녘 2400만 인민을 동포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도,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의 일상의 삶을 지키려면 평화는 필수 조건이다. 분단의 역사와 동북아 질서에 대한 깊고 넓은 통찰에 밑받침된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이 작동해야 하는 이유다.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21세기에 3대 세습을 강행하는 시대착오적 왕조국가? 인민은 굶어죽는데도 핵무기 개발로 주변국을 위협하는 ‘자해공갈단’? 조금만 더 압박하면 곧 망할 실패국가? 쌀을 지원하면 인민한테는 주지 않고 고관대작과 인민군만 배불리 먹일 후안무치한 권력? 어찌 생각하든 각자의 자유이지만, 정작 중요한 건 ‘대북관’이 아니다. 북한의 행태를 증오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희망이 정책이 아니듯, 증오도 정책이 아니다. 싫든 좋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야 정책의 공간이 열린다. 신뢰를 쌓고 이익의 균형을 맞추려는 섬세한 노력 없이 작동 가능한 대북정책은 없다. 이게 현실이다. 현실은 감정보다 강하다. 이 현실에 집중해야 한반도의 비극적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평화와 통일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