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했는데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 건지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국회가 특검을 ‘임명’하는 건 “삼권분립 체계에 위반”되는 일이고 “헌법에 반하는 발상”이라고 했다.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을 돕는 일을 “국정농단이라고 하면 국어사전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생생한 육성이 공개된 국민의힘 공천개입 문제에 대해서는 “‘개입’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를 따져봐야 된다”며 “‘누구를 꼭 공천 줘라’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외압이 아니라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1월7일 대국민 담화와 기자회견에서 한 말들이다. 이 말들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대통령의 정치적 인식이 여전히 진공상태라는 점이다. 진영을 막론한 언론과 시민사회, 정당이 김건희 여사가 윤 대통령의 권력을 사유화해 공천·당무·국정 개입을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데, 정작 윤 대통령은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데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된다”는 식의 태도로 맞선 것이다. 이런 태도는 시민들이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한 주권자라는 정치적 인식을 아예 탑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지성주의다.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저자인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반지성주의를 두고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김 여사의 ‘국정농단’에 대한 문제 제기에 “국어사전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같은 당의 전직 대통령이 여당 공천에 개입했다가 처벌받은 사례도 있는데 “(공천) 개입의 정의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 이런 경향에 정확히 부합한다.
권력을 쥔 사람이 정치적 진공상태와 반지성주의를 무기 삼아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으려 하면, 대통령의 정치를 견제하려는 시민의 공적 의지도 진공상태에 빠진다. 그다음 과정은 대통령에게 직무 수행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제 임기를 마치는 그날까지 모든 힘을 쏟아 일을 하겠다”고 말했으니, 다시 그다음 과정은 시민이 물리적·제도적 방법을 동원해 대통령의 직무 수행을 끝내는 일이 될 것이다.
한겨레21은 이번호 표지이야기에서 ‘김건희-명태균 게이트’의 핵심적인 국정농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경남 창원 신규 국가첨단산업단지(신규 창원산단) 선정 개입 의혹을 다시 한번 보도한다. 아무런 공적 권한 없이 신규 창원산단의 입지 등이 담긴 대외비 문건을 보고받고, 김 여사에게 청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보고서까지 작성했던 명태균씨가 이번에는 산단의 최초 입지를 제안하고 최종 부지를 조정하는 역할까지 맡은 사실이 창원시 고위공무원 증언과 창원시 내부 문건 등으로 확인됐다. 명씨의 동업자는 산단 발표 전후로 산단 예정부지 인근에 8억원을 주고 8965㎡(2711평) 규모의 땅을 샀다.
윤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창원산단 게이트를 두고 “사실과 다른 일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고 모략”이라고 말했다. 이번호 한겨레21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같은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에게 한 번 더 한겨레21 일독을 권한다.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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