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안팎에서는 ‘재창당’ 수준의 전면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인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총사퇴, 지역구 의원인 심상정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민주노동당 시절 한때 2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얻었던 진보정치는,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의당의 참담한 지방선거 성적표가 나온 뒤, 6월7일부터 16일까지 <한겨레21>은 30명가량의 정의당 안팎 인사를 만나거나 전화로 취재해 ‘정의당의 위기’에 대해 묻고 들었다. 30명 중에는 전·현직 국회의원 5명, 6·1 지방선거 출마자 7명, 당과 긴밀한 외부 관계자 5명 등이 포함됐다.
정의당에, 새로운 길이 있을까.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이번호에 이어, 정의당이 나아갈 길 등 못다 실은 이야기는 다음호에 이어진다. _편집자주
“청년 비례 후보를 전략적으로 할당했습니다. 청년에 의한, 청년을 위한 정치. 정의당이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둔 2020년 4월9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서울 여의도동 국회 로텐더홀 계단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당은 앞서 비례대표 경쟁명부의 20%(5명)를 35살 이하 청년에게 할당하면서 비례대표 앞 순번인 1·2번을 류호정·장혜영 후보에게 부여했다. 여성 최다 득표자인 강은미 후보(광주전남연합 출신)는 3번, 최다 득표자였던 배진교 후보(인천연합 출신)는 4번을 받았다. ‘청년 비례대표’는 정의당 역사상 첫 시도였다. 정의당이 청년·젠더 등의 이슈를 선점해 진보 진영의 세대교체와 지지 세력 확장을 노린다는 분석이 나왔다. 젊은 표심을 잡겠다며 당 안의 당인 청년정의당도 만들었다.
“당원들의 의사를 온전히 반영하기 위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청년, 여성 할당제 폐지를 요구한다.”
2022년 6월8일. 정의당이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정의당의 한 의견그룹이 발표한 성명이다. 정의당 내 의견그룹인 ‘새로운진보’는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정당’이 아니라 ‘비호감 지적질 페미 정당’이라는 인식이 정의당의 현주소”라며 비례대표 총사퇴와 청년·여성 할당제 폐지 등 7대 혁신을 요구했다. 이들은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과감한 사회경제적 개혁안을 만들어내는 데” 소홀한 채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에만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IMAGE2%%]최근 정의당은 젠더정치와 세대정치를 둘러싼 내홍으로 시끄러웠다. 당내 소수의견이긴 하지만, 류호정·장혜영으로 상징되는 여성 청년비례대표 중심의 정치가 전통적 지지층을 이탈시키는 원인이 됐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이는 정의당이 내세우는 핵심 의제가 무엇이며, 당이 지지 기반으로 삼으려는 집단이 누구냐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진보의 전통 가치인 노동뿐만 아니라 청년, 여성, 기후위기 등 새로운 이슈를 저울 위에 올려놓기만 하고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정의당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정의당에서 젠더 이슈가 부상한 것은 2016년부터였다. 제20대 총선에서 정의당 로고송을 부른 ‘중식이밴드’의 여성혐오 논란, ‘넥슨 성우 교체 사태’에 대한 논평을 발표했다가 ‘메갈리아 옹호’ 논란이 불거지자 철회한 사건 등이 있었다. 제21대 국회에 들어서도,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문 논란부터 2021년 1월 김종철 당대표 성추행 사태까지 당 안팎에서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한 정의당 당원은 “(조문 논란부터 성추행 사태 사이에) 탈당한 지지자들은 평범한 40~50대 남성이다. 진보정당 지지율을 15~20%까지 올라가게 했던 전통적 지지층인데 이들이 지지를 철회한 것”이라고 말했다.
류호정·장혜영 의원을 정조준하는 비판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문 논란이 일었을 때, 심상정 대표는 장례식에 참석해 공식적인 애도의 뜻은 표하되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막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류호정·장혜영 의원은 피해자와 연대하는 마음으로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망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며 탈당하는 이들이 있었고, 류 의원에 대한 당원 소환 연명장까지 돌았다. 정의당 내부의 젠더·세대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 뒤 정의당을 두고 ‘페미니즘 정당이냐 아니냐’는 십자가 밟기식 공격 프레임이 형성됐다. 2022년 1월 심상정 대선 후보는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정의당은 페미 정당이냐”는 시청자 질문에 “정의당은 페미니즘 정당”이라고 답했다. 심 후보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우리의 입장이 유독 도드라지게 언론에 보도돼왔지만 그렇다고 서민을 위한 정당임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제20대 대선 직후 발표된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심상정 후보는 20대 여성(6.9%), 30대 여성(5.5%)에게서 높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 후보의 전체 득표율은 2.37%였다.
나경채 전 정의당 공동대표는 “‘페미니즘 할 거냐 말 거냐’는 소모적인 논의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지혜롭고 현명한 젠더 정치의 길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노선 논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당원은 “(정의당이) 노동이라는 전통적 영역에서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문제인 젠더 이슈는 당의 명확한 입장을 정리해서 내놓지 못한 채 비판은 비판대로 받는 상황이다보니, 노동은 다루지 않고 페미니즘만 다루느냐는 얘기를 듣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청년·여성에 화살을 돌리는 시각의 근원에는 전통적인 지지층 이탈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다. 진보정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은 조직 노동이었다.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엄호 안에서 진보정당은 진보 고유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의당을 포함한 진보정당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통적 지지층은 점점 당으로부터 멀어져왔다.
민주노총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했을 때 ‘배타적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2012년 제19대 총선 비례대표 부정 경선을 계기로 통합진보당 지지를 공식 철회했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통합진보당-정의당까지 분당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조직 노동과 진보정당의 관계는 서서히 소원해졌다.
흩어지는 노동자를 제대로 붙잡을 만한 당의 정책도 없었다. 당 안팎의 인사들은 정의당이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같은 노동시장의 분절, 플랫폼노동·프리랜서 같은 비정형 노동의 증가까지 급격한 노동시장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노동시장의 규범을 재구성하거나 사회안전망을 재구축하는 등 소구력 있는 대안을 내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2017년 대선 때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핵심 구호로 내세웠지만, 민주노동당 시절에 비하면 노동계와의 밀착력은 현저히 약화됐다.
“(정의당은) 대안정당으로서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돌파를 가능하게 하는 대중적 지지 기반이 없다. 노동에도 기반해 있지 않다. 오히려 (정의당 내부에는) 노동과 결합하면 표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다. 그렇다고 청년에 기반해 있지도 않다. 여성에 기반한 것처럼 보여도 이번 대선에서 이십 대 여성은 이른바 ‘이대남’에 맞서 더불어민주당을 찍었다. 정의당은 그야말로 모래성 위에 서 있는 셈이다.”(김진억 민주노총 서울본부장)
2022년 대선에서도 심상정 후보가 ‘주4일제’ 공약을 내놨지만 당 안팎에서 “일부만 호응하는 공약”이란 비판을 받았다. 대선이 끝나자 주4일제 공약 논쟁은 자취를 감췄다. 1호 당론 법안으로 단식농성까지 하며 2021년 국회에서 통과시킨 중대재해처벌법이 정의당의 유일한 노동 분야 성과로 남았다.
“선진국도 주4일제는 단계적으로 확대해가는 추세다. 그러나 주4일제로 좋은 사람들은 따로 있다. 공공부문이나 대기업 정규직이 아니고선 주4일을 일하면 임금은 당연히 줄어든다. 임금 삭감 없는 주4일제도 막연하다. 무상급식, 무상의료부터 진보정당이 던진 의제가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훨씬 더 고도화되고 복잡해졌다. 이렇게 사회구조가 바뀌었는데 진보적 의제를 기존 관성대로 하면 안 되는 거다.”(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
2021년 민주노총 전직 위원장 4명은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자들의 캠프에 합류했다. 2022년 대선에서 민주노총은 9년 만에 진보 진영 단일 후보를 뽑고 해당 후보에 배타적 지지를 선언하겠다고 밝혔으나 끝내 불발됐다.
노동이 ‘푹 꺼지다’보니, 상대적으로 젠더·세대 정치가 도드라져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당내 리더십 실종과 맞물리며 류호정·장혜영 등 청년비례대표 개별 의원들의 활동만 부각됐다. 2020년 정의당 혁신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심상정 당대표가 조기 사퇴한 이후 2년이 흘렀지만, 심상정의 뒤를 이을 후속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 의원들을 포함해 다양한 당내 의견을 통일된 메시지로 모아낼 구심력도 상실됐다. ‘페미니즘만 하는 정당’이라는 잘못된 꼬리표는 결국 핵심 의제 실종, 당내 리더십 부재가 교집합한 결과다.
류호정 의원의 말이다. “나는 노동자였다. 타투업법, 채용비리처벌 특별법 등 노동관계법을 여러 개 발의했다. 내 정체성을 공격하고 싶어서 내 계급은 봐주지 않는 것 같다.” 장혜영 의원도 “(청년비례대표들이) 해야 하는 일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인가. 청년을 뽑아놓고 완벽한 청년이 모든 것을 다 하기를 바랐던 것이 정의당 청년 비례 전략의 요구사항이었나”라고 반문했다.
6석 규모의 소수정당이 세상의 모든 이슈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전략적으로 핵심 지지층을 어디서, 어떻게 형성할지 중장기 계획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노동과 젠더 이슈를 대립항에 놓는 무의미한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고 정의당 안팎의 인사들은 입을 모았다. “노동 대 페미니즘이라는 대결 구도는 최악의 프레임이다. 어떻게 진보정당에서 그런 프레임이 형성될 수 있는가. 그 둘은 상반되는 가치도, 취사선택해야 할 가치도 아니다.”(이병길 정의당 전략홍보본부장)
2004년 민주노동당은 국회에 처음 입성하면서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 같은 정책을 유권자에게 각인시켰다. 2020년 정의당 혁신위원회가 정의당 지지자를 대상으로 표적집단 심층면접(FGI)을 해보니, 정의당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단어로 ‘노동’과 ‘진보’를 꼽았다고 한다. 젠더, 노동, 기후위기, 불평등 이슈에 고루 숨을 불어넣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진보정당은 계급적으로 노동에 기반해야 한다. 친페미니즘, 친생태적이어야 한다. 라이더나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수도권 불안정 노동층, 창원·울산 등의 전통적인 노동 지지 기반을 복원하고 젠더 정치를 통해 2030세대 여성, 호남이나 농촌 지역의 농민 지지층과 만나야 한다.”(정종권 전 진보신당 부대표·유튜브 <편파TV>와 팟캐스트 <붉은 오늘> 진행자)
“비례대표 할당제 개선과 관련해선 당내 시스템 전반을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청년이나 여성이라는 정체성만 변경하자는 얘기는 숲을 고민하지 않고 빨간색 단풍나무 빼고 노란색 단풍나무 심자는 얘기나 다름없다.”(권수정 전 서울시의원) 여성과 청년이냐, 노동이냐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정의당이 숲을 바라봐야 할 때다. 9월 정의당 지도부를 뽑는 선거에 출마할 후보들이 백가쟁명식 토론으로 답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윤 “‘누구 공천 줘라’ 얘기할 수 있어…외압 아니라 의견”
[속보] 윤 “영부인 조언이 국정농단인가…육영수도 했던 일”
[속보] 윤 “2027년 5월 9일 임기 마칠 때까지 일하겠다”
[속보] 윤 “침소봉대는 기본, 제 처를 악마화”…김건희 감싸
[속보] 윤 “명태균 관련 부적절한 일 안 해...감출 것도 없어”
[생중계] “국민께 죄송”... 윤석열 대통령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
목줄 매달고 발길질이 훈련?…동물학대 고발된 ‘어둠의 개통령’
[속보] 윤, 즉각적 인적쇄신 거부…“검증 중이나 시기 유연하게”
[속보] 윤 “취임 후 김건희-명태균 소통, 일상적인 것 몇번뿐”
[속보] 윤 “모든 것이 제 불찰…국민께 진심 어린 사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