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게 표시한 부분은 윤석열 당선자와 대변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3월30일 오전 10시, 통의동 인수위 주변 골목
2022년 3월3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 그로부터 20일이 흘렀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주변 골목 풍경은 여느 날과 같이 조용히, 뜨겁다. 경찰 버스와 폴리스라인, 당선자를 환영하는 펼침막 사이 정책적인 우려와 요구를 담은 기자회견이 줄 잇는다. 기자회견에서는 경쟁 교육을 우려하고, 반노동 정책을 걱정한다. ‘임대차 3법’ 후퇴를 막기 위해 세입자들도 목소리를 얹었다. “나와서 세입자 이야기도 좀 들어주십시오. 듣지 않는다면 (집무실이) 청와대든 용산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기자회견이 주로 열리는 장소는 인수위 사무실에서 100m가량 떨어져 있다. 이들의 목소리가 인수위까지 닿았을지 알 수 없다. 저마다 갈색 봉투에 전할 말을 담아 경찰에 건넬 뿐이다. 인수위 사무실에 좀더 가까운 자리에 선 이들은 기자회견은 언감생심, 조용히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안에서 손팻말이 보일까? 창문은 넓은데, 역시 알 수 없다. 비가 내린다. 손팻말을 더 높이 치켜들 뿐이다.
윤석열 당선자가 머무는 인수위의 바깥 풍경은 우리가 알아온 민주주의 국가의 정권교체기 모습 그대로다. 앞으로 5년의 정책 비전 속에 나도 포함될 수 있는지, 나와 정책의 관계는 무엇이 돼야 할지 묻고 요청한다. 그런 일말의 희망과 우려가 인수위 사무실 앞 좁은 골목으로 몰리고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부 전환기는 당선자를 중심으로 한 정치의 힘이 관료제를 압도한다. 유권자의 관심 또한 집중된다. 무엇보다 경쟁적인 선거기간을 지났으므로, 좀더 거시적이고 긴 안목에 바탕을 두고 합리적으로 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박재완, ‘정부전환기 국정기조의 형성 과정’, <한국행정연구>, 2016년 참조) 이를테면 관성을 뛰어넘는 개혁이 가능하다. 당면한 문제를 넘어 시대적 문제를 짚고, 비전을 제시하고, 개혁 과제를 정리한다. 개혁의 거시적인 비전은 사회 전반을 아우르므로 한때 갈려 있던 시민도 일단은 마땅히 한 테두리 안의 국민으로 불릴 수 있다. ‘당선 직후 허니문’이 괜한 말은 아니다.
윤석열 당선자의 20일을 생각한다. 당선자의 행보를 돌아보는 기준은 임기 5년을 아우르는 메시지다. 인수위 바깥 조용하나 간절하게 정치하는 시민에 대한 응답이다. 당선자는 20일 동안 2022~2027년을 이룰 어떤 국가정책 비전을 설명했는가. 어떤 개혁을 주장했는가. 그 안에 얼마큼 다양한 시민이 국민으로 호명됐는가.
당선 인사3월10일 오전 11시, 국회도서관 지하 1층 대강당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중산층을 더욱 두텁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따뜻한 복지도 성장 없이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성장과 복지가 공정하게 선순환해야 가능합니다.” -‘당선 인사’, 2022년 3월10일 11시, 국회도서관 지하 1층 대강당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이상한 말은 아니지만 인상 깊은 말도 아니다. 윤석열 정부 5년을 아우르는 정책 기조인가? 알 수 없다. 선거 캠페인 기간에도, 당선 인사 이후로도 의미 있게 강조되지는 않았다. “사실 복지를 계속 고민해온 우리 입장에서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선진화(이명박), 경제민주화(박근혜), 소득주도 성장(문재인 정부) 같은 정책 기조는 선거 캠페인 단계에서 마련됐는데 20대 대선에서는 사회·경제 정책이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 분위기가 아직 이어지는 것 같다.”(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
정부의 정책 기조는 일반적으로 성장-노동(일자리)-복지의 유기적인 관계를 설명한다. 보수적일 때도 진보적일 때도 있다. 다만 표현만은 국민 통합적이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 기조였던 ‘선진화’ ‘기업 프렌들리’조차 그랬다. 이명박 정부는 국정백서에서 친기업 정책이 실은 일자리를 위해서였고, 일자리는 곧 복지, 그러므로 모든 시민 계층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적는다. 말이나마, 소홀히 여겨지는 부문을 언급하고 눈치 봤다. 당선된 순간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다. 한 명이라도 더 당선자의 비전 안에 포함해야 지지받고 나아갈 수 있다.
정책 기조에는 또한 현재 거시경제 상황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판단을 반드시 담는다. 경제적 설명 또한 중요하고 강력한 정치적 설득의 도구다. “일부에서는 대기업 편들기로 곡해해서 비판의 소재로 삼기도 했지만, 당시 경제의 활력이 줄어들고 투자 심리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투자 심리 회복에 있었다.”(<이명박 정부 국정백서>) 기업투자, 민간소비, 재정지출로 구성되는 총수요 가운데 여지가 많은 것으로 분석한 기업투자를 먼저 자극했다는 의미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재정지출과 민간소비를 통해 투자 활성화와 성장에 이르는 경로를 강조했다.
2022년 한국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성장은 어떤 대목을 해결해야 이룰 수 있고, 그로부터 복지와 임금 소득 분배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은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며 서로의 보완적 관계를 설명하거나 경제적 배경 분석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정권 초라서 말할 수 있는 개혁과 비전의 빈 공간을 채우는 건 본뜻을 알기 어려운 알쏭달쏭한 단어다.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실용주의이고 국민의 이익입니다.”(3월26일, 인수위 워크숍) 혹은 중장기 과제보다 임기 말인 문재인 정부라도 해야 할 법한 당면 현안을 주로 맴돈다. “자영업자·소상공인들의 경제적 손실보상을 포함해서 (코로나19) 방역과 확진자들에 대한 추경 문제에 대해 인수위를 구성하면서 검토에 들어갈 생각입니다.”(3월13일, 인수위 구상 기자회견)
3월21일 오전 11시30분, 통의동 인수위원회 사무실
성장-노동-복지에 대해 이렇다 할 큰 그림을 만나지 못한 채 열하루가 지났다. 3월21일 오전 10시30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윤석열 당선자에게 정례 대화를 제안했다. 비정규직과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 같은 노동 사각지대 문제 등을 터놓고 얘기해보자고 했다. 윤 당선자 역시 이들의 노동권 보장을 공약집에 언급한 바 있다. 국내 제1노총 위원장까지 나선 기자회견은 전달 여부조차 불분명한 인수위 바깥의 풍경, 그 가운데 하나로 묻혔다. 윤 당선자는 1시간 뒤 재계인 경제 6단체장을 만났다.
경제 6단체장 만남에서 쏟아진 노동계에 대한 강경한 발언이 우선 인상적이다. 노동쟁의에 대한 “공권력 집행”과 시행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중대재해처벌법 수정”을 요구했다.(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고용 조건과 노동시간의 유연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공개된 윤석열 당선자의 발언에도 대기업과의 만남에 한마디쯤 나오게 마련인 중소기업·노동자와의 상생 요구, 투자 독려 등은 없다. 그저 환영한다. “결국 기업이 성장하는 게 경제 성장 아니겠습니까.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는 제도적인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런 것들을 제거해나가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왜 노동 친화적이지 않냐는 비판은 미뤄둔다. 정책, 특히 노동처럼 생존권이 첨예하게 걸린 대목일수록 치열한 정치적 협상은 불가피하다. 재계와의 만남과 분위기는 전략적이지조차 않아 의아하다. “만일 대기업 중심 정책을 펴고 노동 개혁을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더욱더 노동계나 중소기업을 먼저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소 말할 기회가 적은 약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반대 목소리를 먼저 들어 불만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린다는 전략적 측면에서도 그렇다.”(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듣는 척’을 학계에서는 ‘상징적 반응성’으로 부른다. 실제 예산편성과 집행(실질적 반응성)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도 불만을 잠재우는 효과를 노린다. 국민의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분석한 논문을 보면 우리 정부들은 실질적 반응성은 낮아도 상징적 반응성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신현기·우창빈, ‘대통령은 국민의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나’, <한국사회와 행정 연구>, 2018년 참조)
임기 동안 결국 실패로 마친 노동 개혁을 시도한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당선 일주일 뒤(2012년 12월26일) 중소기업중앙회를 전국경제인연합회보다 먼저 찾았다. 전경련에서는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부터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지혜를 발휘하고 고통 분담에 나서달라”고 노동자 보호를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대화 제의에 대한 윤석열 당선자의 답변을 끝내 듣지 못했다고 했다. 당선자의 고민이어야 할 사회적 갈등을 노조가 먼저 걱정한다. “(3월30일까지) 반응은 아직 없다. 국정 운영은 대립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듣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텐데 재계의 발언을 무분별하게 흡수하는 모습만 보인다. 사회적 갈등이 걱정된다.”(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
3월28일 오전 9시, 당선자 대변인 브리핑
“총리 인선은 총리 인선만이 아니라 경제부총리나 금융위원장, 대통령실 경제수석까지 경제원팀이 드림팀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줄 최적임자를 총리 후보자로 찾습니다.”(김은혜 당선자 대변인, 3월28일 브리핑)
4월 초 예정한 윤석열 정부의 첫 국무총리 인선, 전문가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이유가 있다. “당선자는 경제·사회 정책은 본인이 잘 모르더라도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는 모습을 후보 시절부터 보여왔다. 총리나 경제부총리 등이 정해지면 새 정부의 정책 기조도 드러날 것 같다.”(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윤석열 대통령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시대 진단, 그에 맞춘 정책, 정책 사이의 유기적인 결합, 그 사이 갈등과 조정의 구도를 전망하고 판단할 여지를 기대한다.
유력한 국무총리 후보였던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스스로 국무총리직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3월30일). 그렇다면? “당선자 주변 인물들이 대부분 과거 지향적인 10년 전 보수 정부의 관료형 전문가 혹은 관료들로 보인다. 관료는 관리에는 능하지만 개혁에는 약하다. 시장의 왜곡된 분배구조로 인한 양극화 같은 고질적인 경제 문제 해결, 탄소중립·글로벌 공급망 충격 등으로 인한 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적응을 생각하면 개혁적인 접근이 절실한 시기다.”(박상인 교수)
‘정책 표류 현상’을 우려한다. 새로운 정책 도입이 아니라 환경 변화에도 변화 없이 멈춰 있거나 느릿하게 변화하는 정책으로 인해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현상이다. 시민은 변화의 편익보다 그로 인한 비용에 더 민감하므로 보완책을 마련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정책 표류는 개혁에 견줘 부정적인 영향이 바로 표 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장 힘겨운 개혁의 걸림돌로 여겨진다.(구현우, ‘정책분석의 세 가지 차원: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 <한국지방정부학회 2019년도 추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참조)
일 벌이는 두려움으로 무작위의 과오를 범하는 대통령이 되는 일을 누구보다 경계하는 건 윤석열 당선자일 테다. “지금은 부모의 지위와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로, 이 구조를 탈피하려면 국가 전체의 역동적이고 도약적인 성장이 필요하다.”(3월22일 인수위 간사단 회의) 구조를, 무려 ‘탈피’하길 바란다. 관행을 벗어날 정치의 의지, 광범위한 설득이 필요하다. 집권 초 80% 넘는 지지를 받은 문재인 정부조차 잘 해내지 못한 일이다.
당선, 그리고 20일은 선거기간 ‘갈라쳐진’ 유권자, 그 가운데 특히 당선자에게 의구심을 품은 시민을 설득하는 시간이어야 했다. 그들 역시 기대를 품을 법한 국가 비전을 전해야 했다. 한편에 힘을 실을 때 통합적인 정책 기조 속이라면 보일 수밖에 없는 소외되는 부문을 함께 고려한다고, 눈짓이라도 하면 좋았다. 정책의 진화와 구조 개혁을 꿈꾼다면, 그를 위한 정치적 자원을 축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은 없었으니까. 정권교체기의 흥분, 개혁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갈 힘의 갱신은 대통령 5년 단임제가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설렘이다.
3월30일, 인수위 건물 안. 정부부처의 인수위 업무보고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인수위 각 분과는 여성단체 등 시민사회를 만나기 시작했다. 별다른 성과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윤석열 당선자는 서울 명동성당 급식소를 찾아 앞치마를 두르고 배식 봉사에 나섰다. 그 자리에서 만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국민을 편 가르지 않고 통합의 정치를 펴나가라는 국민의 호소를 귀담아듣겠다’고 한 말씀에 공감한다”고 했다. 당선자 윤석열이 대통령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41일 남았다. 반전은 그날들 가운데 어느 하루, 마침내 펼쳐질까.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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