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경기도지사 출신 한 정치인은 이렇게 자조했다. 서울특별시에 버금가는 예산(2017년 기준 서울 29조8천억원, 경기도 19조6700억원)과 두 배가량의 행정 면적을 지니고 있음에도 ‘지방 도백’이라 중앙정치 무대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한 것이다. 서울시장과 달리 경기도지사는 대선 주자들의 무덤이었다.
바른정당 남경필 경기도지사도 힘겹게 남태령(서울 관악구와 경기도 과천시를 잇는 고개)을 오르고 있다. 사교육 전면 금지, 모병제 도입, 수도 이전 등 잇따라 파격적인 공약과 정책을 던졌지만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외려 그의 공약들은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남 지사의 공약을 두고 이 접촉한 전문가들은 “공약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슬로건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와 세밀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1%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지지율 미달’ 탓에 한국갤럽 여론조사 대상에서 빠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남 지사가 내건 공약을 점검했다. 특히 누리집과 각종 기자회견, 토론회, 저서에서 밝힌 공약 가운데 논란이 된 것을 살폈다. _편집자
모병제 공약에 가려졌지만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내세운 공약 가운데는 ‘핵무장 준비’가 있다. 이는 적잖은 우려를 낳는다. 그는 2월19일 ‘신부국강병론-한국형 자주국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제목의 대한민국 리빌딩 공약에서 핵무장 준비를 최우선 순위에 뒀다. 그는 “평화적 핵주권 행사 차원에서 대응적·자위적 핵무장 가능성을 검토하겠다. 핵무장 준비를 공론화함으로써 안보에 대한 분명한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따른 3단계 대응 전략으로 미군의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폭격기 한반도 상시 순환 배치 또는 주기적 전개→유사시 사용 가능한 한반도 인근 전술핵 배치→전술핵의 한반도 배치 및 자체 핵무장 준비를 제시했다.
준비되지 않은 ‘핵무장 준비’ 공약핵무장 주장은 과거 북한의 핵실험이 있을 때마다 정몽준 전 한나라당 의원, 원유철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꺼낸 ‘강 대 강’ 카드였다. 남 지사 쪽에서는 “지금 당장 핵무장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북핵 문제에 관한 외교적 움직임을 봐가며 하자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공약이 보수층의 표심을 의식했을 뿐 실현 가능성이나 동북아 정세에 미칠 악영향 등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미현 참여연대 평화국제팀장은 “미국의 전술핵을 끌어들여 북한의 미사일, 핵무기 개발에 대응하는 것은 역대 정부에서 추진해온 한반도 비핵화와 정반대로 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팀장은 “우리가 전술핵을 배치한다고 해도 북한의 핵 억지력을 높일 수 없다. 미국의 핵 억지력에 의존할수록 한반도 비핵화는 더 멀어진다”며 “북핵 개발을 막겠다고 우리도 전술핵을 들여놓겠다는 논리는 국내뿐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노력과도 배치된다. 남 지사의 주장은 국제사회의 논의나 합의를 살피지 않은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군사적 실효성 차원에서도 한반도 전술핵 배치가 이득이 없다고 지적한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미군은 B-2, B-52, B-1B 등 괌 앤더슨 기지에서 출격해 한반도에 도달하는 시간이 2시간 안팎에 불과한 전략 폭격기가 있다. 태평양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도 평양까지 30분이면 족히 이를 정도로 대북 핵 억지력은 이미 충분하다. 전술핵을 장착한 미군 전투기가 이륙하면 북한은 이를 핵공격 신호로 간주해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어 핵전쟁으로 비화할 위험성만 키울 뿐이다”라며 “전술핵 배치는 백해무익해 미국 정부도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모병제 공약도 계층 불평등 논란국제 상황을 고려하면 한국 자체 전술핵 배치는 더욱 요원하다. 남 지사는 정책 에세이집 에서 “우방국들의 핵무장에 반대해왔던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핵무장을 한다고 해도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만큼 큰 제제를 가할지는 알수 없다”고 다소 빈약한 근거를 제시했다.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자체 핵무장을 하려면 NPT에서 탈퇴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도 추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 추락과 국제사회의 제재가 불가피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부를 비롯해 우라늄 수입 금지로 인한 원자력발전 중단, 경제제재 등 뒷감당은 걷잡을 수 없다.
동북아 군비 경쟁에도 한국이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당장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들고나올 수 있고, 중국 역시 일본의 움직임에 따라 군사적 대응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 주변이 핵무장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는 셈이다. 최근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로 인한 중국의 거센 반발은 핵무장 파장을 가늠하는 본보기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남 지사가 주장하는 핵무장 준비는 한국의 자주국방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핵·미사일 개발로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을 쓰는 북한에 같은 논리로 대응하자는 것은 안일한 방책일 수 있다”며 “더구나 남 지사는 연정을 내세우는데 이 공약은 야당에서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남 지사가 자주국방 정책의 하나로 내세운 모병제 공약은 예산 문제와 함께 사회적 형평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남 지사는 “인구절벽 상황에서 병력 유지를 위해 2023년부터 직업군인 5만 명을 모병하겠다. 이후 점진적으로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9급 공무원 수준인 200만원가량의 월급을 지급하면 3조~4조원이 추가로 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은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군은 계급별 호봉제인데 (남 지사의 공약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현재 약 20만 명인 군 간부의 인건비 총액은 연간 8조~9조원이고, 병사 43만 명의 인건비는 8천억원이다. 이 구조를 모병제에 적용하면 연간 최소 10조원가량의 막대한 예산이 더 든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유승민 의원은 “모병제는 상위 계층의 합법적 병역 회피의 길을 열어주고 하위 계층만 입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지난해 9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현행 징병제 찬성 의견이 48%로 모병제 찬성 의견(35%)보다 높았다. 남 지사의 다른 공약들과 마찬가지로 관심과 논쟁은 불러일으켰지만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전두환처럼 욕먹어도 하겠다”또 다른 주요 공약으로 사교육 전면 폐지와 수도 이전이 있다. 사교육 전면 폐지는 제1호 공약이다. 그는 “연간 30조원에 이르는 사교육비는 중산층마저 빈곤의 딜레마에 빠뜨린다. 사교육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구시대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다. 2018년 지방선거 때 사교육 폐지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바른정당 후보 토론회에서 그는 여러 차례 “남들이 과격하다고 해도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욕을 먹어도 꼭 하겠다”며 사교육 폐지를 뼈대로 한 ‘교육 김영란법’을 제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를 위해서는 ‘사교육 폐지는 위헌’이라는 관문을 넘어서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2000년 4월 재판관 9명 가운데 6명의 찬성으로 사교육 금지 위헌 판결을 내렸다. 헌재는 “경제력의 차이 등으로 말미암아 교육의 기회에 있어 사인 간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국가는 원칙적으로 의무교육의 확대 등 적극적인 급부 활동을 통해 사인 간의 교육 기회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 뿐이다. 과외 교습의 금지나 제한 형태로 개인의 기본권 행사인 사교육을 억제함으로써 교육에서의 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또 과외 금지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자유로이 배우는 행위를 제한함으로써 행복추구권과 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제한한다며 “입법 목적은 정당하지만 입법 수단의 정당성이 없다”고 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사교육 폐해에 대한 남 지사의 문제의식엔 동의하지만 그 공약의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김경근 고려대 교수(교육학)는 “사교육 전면 폐지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과외를 전면 금지했던 전두환 정권 때도 캠핑 과외나 옥탑방 과외 등이 있었다”며 “사교육은 자녀를 잘 가르쳐보겠다는 부모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는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는 “인위적으로 사교육을 전면 폐지하기보다 대학이 신입생을 뽑을 때 성적만 좋은 학생 대신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고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학생을 뽑는 쪽으로 전형 방법을 바꾸는 것이 현실적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대학 홍후조 교수도 “사교육을 근절하겠다는 노력과 결단은 칭송할 만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사교육은 내밀하게 음성화할 것이고, 비용 역시 더 올라가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력한 의지에 견줘 실천 로드맵은 부실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남 지사는 의석수 33석에 불과한 군소 정당의 후보다. 국민투표까지 밀어붙일 동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남 지사는 사교육 폐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한다. 그러나 그가 속한 바른정당은 다수당이 아니다. 지금 정치 지형에서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교육 폐지 국민투표가 가능할지 회의적이다”라며 “슬로건과 공약은 다르다. 공약은 실천을 담보할 디테일(세부)이 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구 세습, 가족 문제도 꼬리표수도 이전 공약 역시 위헌 장벽을 넘어야 현실화할 수 있다. 남 지사는 “국토 균형발전을 위해 청와대와 국회, 대법원과 대검찰청 등 주요 기관을 세종시로 이전해 명실상부한 수도로 완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수도권 과밀화로 전셋값 폭등, 출퇴근 전쟁, 미세먼지 등 환경오염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다”며 “서울과 수도권은 경제수도로, 세종시는 정치수도로 다원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헌재는 2004년 10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7명의 다수의견으로 “서울이 수도라는 점은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에 해당된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폐지하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남 지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로서 국론 분열을 조장한다며 수도 이전에 반대한 바 있다. 그는 지난 1월 국회에서 열린 대학생리더십아카데미에서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민한 대목이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였구나 생각하게 됐다. 그중 하나가 수도 이전”이라며 생각이 바뀐 이유를 말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이미 헌재 판결이 난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기존 제도의 존중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치 입문부터 지금까지 남 지사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오렌지·금수저’ 이미지다. 남 지사가 33살 때인 1998년 부친 남평우 전 의원 사망 뒤 치러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내리 5선 경력을 쌓았다. “장자인 네가 지역구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의 유지”라는 모친의 말은 당시 미국 예일대 경영대학원생으로 유학하던 그의 진로를 바꿨다. 이전까지 남 지사는 부친이 운영하던 사주를 염두에 뒀다.
재선 의원이던 2003년 5·6공화국 세력 용퇴론을 주장하다 “부친은 훌륭한 분이지만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며 오렌지족으로 컸다”는 당시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의 반격 발언 뒤 ‘오렌지’라는 말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후 새정치수요모임, 경제민주화실천모임 등을 이끌며 당내 개혁의 목소리를 냈지만 소장파의 ‘객기’ 정도로 평가절하됐다. ‘금수저’ 이미지는 2014년 군 복무 중인 장남이 후임병 폭행과 성추행 혐의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면서 더 굳어졌다. 구속영장이 두 차례 청구됐지만 기각되면서 특혜란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오렌지’와 ‘금수저’를 넘어남 지사는 “밑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살면서 올라오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후광과 남겨주신 재산이 금수저로 내 이미지를 고정하는 측면도 있지만, 사람들이 금수저 정치인이라고 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금수저든 흙수저든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라며 “금수저들이 힘들어할 정책을 펴 그 세금으로 중산층과 서민층에 큰 혜택을 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처럼 금수저로 다른 사람을 떠먹이면 어떨까”라고 했다.
남 지사는 빠르게 진화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남 지사를 “마음이 열려 있고 지적 호기심이 많다. 틈나는 대로 질문하고 공부한다. 머릿속 살림살이가 간단치 않다”고 평가했다. 만만하게 볼 2세 정치인이나 금수저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가장 먼저 새누리당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중도개혁 보수가 설 땅은 역대 어느 대선 때보다 좁아 보인다. 과연 남 지사는 ‘마의 남태령 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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