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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북리뷰] 의사·컴퓨터 백신 개발자·벤처사업가·교수에서 정치인까지…

책으로 읽는 안철수의 삶과 생각
등록 2017-05-03 18:03 수정 2020-05-03 04:28

어릴 적 ‘흰둥이’로 불렸다. 하얀 얼굴과 노란 머리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친구들의 놀림이 싫었던 아이는 스스로 외톨이가 되었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두들겨 맞기라도 하면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독서, 동식물 기르기, 우표 수집, 영화보기.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만 늘어갔다. 그런데 반항은커녕 사춘기도 겪지 않았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의사인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의대에 진학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내성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또 자부심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갔다. 지금도 연락이 되는 친한 친구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중략) 그런 성격을 가지고 지금까지는 용케도 잘 버텼다고 생각한다.”(, 비전 펴냄, 1995)‘우울’했지만 ‘감사’했던 유년 시절

33살 안철수가 쓴 첫 자서전에는 ‘우울’했지만 ‘감사’했던 유년·청년 시절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다. 얼핏 보면, 화려한 스펙과 수많은 지지자를 가진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지금의 삶으로 그를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이 내성적인 그에게 방향타가 됐다. 늘 고민은 깊고 짧았다.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넘어갈 때마다 제가 고민한 가장 큰 기준은 ‘개인적으로 뭘 많이 얻을 수 있는가’나 성공 확률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였습니다.”(, 김영사 펴냄, 2012)

1998년 서울대 의대 박사과정을 밟던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한 전국적인 피해를 줄이려”고 백신 개발자가 됐다. 미국으로 유학(공학 석사)을 떠나기 전인 1995년에는 “(한국에 남아 있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싸우는 사람들이 정당한 보수를 받고 열심히 일하도록” 안철수연구소를 차렸다.

꼭 10년 만인 2005년 “산업생태계를 개선하고 기업들을 도와주려”고 또다시 미국 유학(경영학 석사)길에 올랐다. 3년 만에 돌아온 그는 벤처사업가에서 카이스트·서울대 교수이자 ‘청춘 멘토’로 변신했다.

머지않아, 다섯 번째 갈림길에 섰다. ‘아이들의 먹는’ 문제 때문이었다. 안 후보는 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문제로 주민투표, 오세훈 서울시장 사퇴, 재보선이 이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새로운 ‘위기감’을 느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추진으로 인한) 행정 혼란, 세금 낭비 등 잘못에 대해 제대로 대가를 치르지 않고 한나라당이 다시 시장직을 차지하게 된다면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후보 여론조사에서 제 이름이 거론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나라도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한 10% 정도 들었다.”() 5년 전인 2006년, 한나라당으로부터 서울시장 후보직 제안을 받고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하던 때와는 분명 마음이 달랐다.

곧바로 정치판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2011년 9월6일, 지지율 50%이던 안 후보는 지지율 5%의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내줬다. 조건 없는 깨끗한 양보로 안 후보는 단숨에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강동호 뉴딜정치연구소장은 당시 정치 초보인 안철수의 뛰어난 정치적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서울시장 양보 외에) ‘안철수 재단’을 만든 것도 단순히 사회 기여 측면만 생각했다기보다는 딱 적절한 타이밍,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필요한 시점도 고려한 거다. ‘타이밍의 귀재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더굿 펴냄, 2015) 그로부터 꼭 1년 뒤인 2012년 9월19일, 안 후보는 직업 정치인으로 변신을 공식화한다. “미래 희망의 사다리를 만들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다. 의대생 시절 의료봉사를 나갔던 서울 구로동에서 마주한 저소득층, 청춘 콘서트에서 만난 절박한 처지의 청년들이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일을 정치의 소명으로 삼았다.

‘남자 박근혜’라는 비판

그러나 정치에 뛰어들면서도 ‘색깔’은 드러내지 않았다. 기득권 타파, 양당 독점의 여의도 정치 탈피를 뼈대로 한 ‘새 정치’의 깃발을 들고, 중도·합리주의 노선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했다.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부터 ‘정체성을 밝히라’는 공격이 이어질 때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상식파”라고만 답했다. 기업가·교수 출신으로 몸에 밴 성향 역시 작용했다. “사실 기업을 경영하는 동안은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데 회사를 책임지는 경영자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친재벌 등 정책에 대한 비판은 소신껏 해왔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현상’이라 불릴 정도로 뜨거웠던 안 후보의 인기는 몇 차례에 걸쳐 반감된다. 새정치의 핵심인 ‘제3세력화’에서 후퇴해 기존 정당에 포섭되는 듯한 선택을 할 때마다 위기를 맞았다. 2012년 11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의 단일화, 2014년 3월 민주당과의 합당, 2014년 4월 지방선거 무공천 번복 등으로 이어진 ‘철수 정치’가 대표적이었다.

‘독자세력화’에 뜻을 같이했으나 중대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금태섭 변호사 등 동료와 참모들도 곁을 떠났다. 불통 리더십, ‘남자 박근혜’라는 비판에 대해 안 후보는 최근 펴낸 대담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을수록 모든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고뇌하고 결단을 내리니 그렇게 비치는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다.”(,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2017)

그중에서도 뼈아픈 비판을 들었던 ‘합당 후 새정치민주연합 창당’은, 2017년 대권을 향한 안 후보의 강한 집권 의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한때 안철수 신당 창당을 준비하던 새정치추진위원회에서 일했던 오창훈 변호사는 안 후보의 충격적인 선택이 철저히 목표 중심적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안철수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과 졸업생이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목표나 결론에서부터 실행계획을 역산해서 생각하는 거다. 2017년 대선에 출마해야 한다. 그러려면 (2016년) 총선에서 20석 이상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창당 선언해야 하는데 실행계획이 다 막혀버리니까 결국 플랜 B(합당)가 나온 거다.”()

“같은 실수를 결코 두 번 하지 않는다”

안 후보는 다시 ‘제3세력화’에서 기회를 찾았다. 문재인 후보와의 갈등에 시달리던 그는 2015년 12월 민주당에서 탈당한 뒤 이듬해 2월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이어 4월 총선에서 원내 39석 확보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이후 대권 국면에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안희정 충남도지사에 밀리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야권 연대는 없다”며 독자 출마를 밀어붙여, 결국 ‘문재인 대 안철수’라는 양강 구도를 만들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실패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결코 두 번 하지 않는다.” 정치인 안철수가 두 번째 도전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5월9일 판가름 난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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