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새누리당 대구시당이 탈당 후보들에게 “대통령 존영을 반납하라”고 해서 이른바 ‘존영 논란’에 불이 붙었다. 존영(尊影)은 ‘높은 사람의 사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사진이 존영? 지금이 여왕 시대냐?”고 했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좋은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라고 반응했다. 존영이라는 말은 ‘박정희 대통령 존영이 도안된 우표’처럼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자주 쓰였다. 사람들이 반발하고 조롱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과거 민주당 역시 ‘존영’ 표현을 썼다고 반발한다. 실제로 2010년 정세균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회의 석상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민의 영웅 두 분 우리 민주당의 지도자이시고 저렇게 두 분의 존영이 걸려 있습니다마는 우리 민주당의 책임이 정말 막중하다….” 여기서 “국민의 영웅 두 분”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너희도 썼으니 우리가 써도 된다는 것일까.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두 거대 보수정당이 ‘존영’이란 말을 21세기에도 꾸준히 써왔다는 것만은 알겠다. 형식적이나마 민주정이 확립된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존영’ 논란은 자체로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공손한 표현이 아니라 봉건의 잔재로 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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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피습당했을 때, 어느 미술평론가가 트위터에 올린 말도 비슷한 느낌을 줬다. 그는 “시해 미수”라는 표현을 쓰며 가해자에게 격한 증오를 드러냈다. ‘시해’라니…. 시해의 사전적 의미는 ‘부모나 임금을 죽임’이다. 즉, 1973년생인 미국대사는 그 평론가에게 ‘부모나 임금’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일개 평론가가 아무리 봉건성에 찌들어 있어도 사회에 그렇게 큰 영향은 없다. 웃으며 무시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력을 쥔 자들이 ‘존영’ 같은 말을 남발하며 권위주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자에 대한 과도한 숭앙은 언제나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아부나 아첨이어서 나쁜 게 아니다. 지도자를 신비화하고 권력의 작동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게 문제다.
권위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지도자를 어떤 초월적 존재로 격상시키는 이들이, 지도자를 실제 그런 존재로 믿고 있을 가능성은 낮다. 그들은 파워 엘리트이며 결코 멍청하지 않다. 이들은 지도자가 탁월해서 숭배하는 게 아니라, ‘숭배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다.
일본의 사회학자 오사와 마사치는 에서 다이쇼시대 일본 파시스트 사상가들의 천황 숭배가 지닌 특징을 예리하게 갈파했다. 예를 들어 기타 이키는 다이쇼시대 천황을 “해파리 연구자”라며 친근한 사람처럼 부르지만, 천황을 더할 나위 없이 숭배하고 있다. 천황이 카리스마적 리더가 아니라 ‘평범한 해파리 덕후 아재’일지라도 아무 문제 없다. 그런 인간에게 전적으로 복종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파시스트에게 천황 숭배의 요체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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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 대통령들은 왕이 아니며 슈퍼 히어로도 아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국민의 머슴”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와 똑같은 개인이고, 한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위대함’이라는 말과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유일하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우리 각자는 어떤 인간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소설 은 민주정의 이런 면모를 극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제국의 황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전멸 직전의 동맹군 사령관 알렉산더 뷰코크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관대한 처분을 약속한다. 하지만 뷰코크 장군은 ‘내 손자는 당신 같은 인물이면 좋겠다’면서도 항복을 담담히 거절한다. 늙은 군인은 젊은 정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는 친구를 만드는 사상이지 군신을 만드는 사상이 아니다. 나는 좋은 친구를 원하지만 좋은 주군이나 좋은 신하를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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