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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법

등록 2016-03-01 14:47 수정 2020-05-03 04:28

냉소의 시대이다. 현실을 냉소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정치인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고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정치의 가장 전형적 장면은 음흉한 정치인이 세 치 혀를 놀려 국민을 속이고 자기 잇속을 채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권자의 제1덕목은 정치인에게 속지 않는 것이다.

이건 음악의 사례와도 유사하다. 립싱크 가수가 기분 나쁜 것은 실력도 없으면서 노래에 감동하게 만들어 ‘나’를 속이기 때문이다. 립싱크를 하지 않더라도 내 돈을 빼앗기 위해 없는 예술성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수의 예술혼이 한 점 의혹 없이 받아들여지는 순간은 그가 사망한 다음에야 온다. 죽음이야말로 누군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보증 수단이다.

정치인의 ‘필리버스터’에서 느껴지는 어떤 숭고함은 이런 진실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10시간 넘는 연설을 한 것에 어떤 저질 신문 기사의 제목을 보자. ‘가녀린 50대 女의원의 미친 체력’…. 이 문구의 반여성적인 몰상식을 성토하는 건 뒤로 미루자. 우리가 지금 주목할 것은 여성혐오자마저 장시간의 연설에서 어떤 ‘숭고’를 보았다는 거다. 은수미 의원의 ‘가녀린’ 무언가를 압도하는 어떤 ‘미친 체력’을 말이다.

상식적으로 10시간 이상 연설을 한다는 건 웬만한 의지와 신념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까지 하는데 거기다 대고 ‘당신은 정치적 이득을 얻자는 불순한 의도로 자해를 하고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이 은수미 의원을 향해 “그런다고 공천 못 받아요”라고 말한 사실이 공분을 사는 건 이런 이유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다. 은수미 의원은 “김용남 의원은 그럴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남 의원은 아마 ‘돼지’일 것이다. 김용남 의원의 발언은 정치인에 대한 사람들의 전형적 선입견을 증명해준 쾌거(?)다. 즉, 은수미 의원에 감동한 사람들은 정치의 전형을 냉소하면서도 ‘진정한 무엇’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다. 필리버스터 정국을 통해서야 (그러니까 뒤늦게야) 진정한 정치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한탄은 대개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욕망은 뭘까? 새누리당을 향한 아낌없는 지지인가? 그렇지 않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상당수는 ‘속아넘어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정치인이 순수하지 않고 개인의 이득을 늘 챙기며 공천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온갖 술수와 공작을 평가하고 그것을 정치력과 등치시키는 논리에 아주 익숙하다. 이런 논리는 종종 그런 정치인의 활약이 자신과 지역의 어떤 물적 이득을 늘려줄 것이라는 ‘경제적’ 기대에 편승한다.

필리버스터를 강행하는 국회의원들을 보며 ‘신념의 정치인이 우리 정치에도 이렇게 많았구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친구 지역구에 눈도장 좀 찍겠군’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숭고한 행위가 정치적 냉소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어떤 교두보로 작용한다는 거다. 제1야당은 이렇게까지 한 끝에 겨우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는 당인지를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설명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물론 결말은 씁쓸할 것이다. ‘진정한 정치인’을 찾던 사람들은 지도부의 타협과 맥 빠지는 결말에 실망해 원래 자신의 자리인 냉소주의의 품 안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정한 정치인’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진정한 그 무엇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걸 찾기 위한 고리를 붙들고 놓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할 때에야 우리는 끝내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냉소를 거부할 수도 없고 단지 거기에 머무르기만 할 수도 없다. 우리는 냉소를 횡단해야 한다.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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