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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가마니로 착각한 여자

복면금지법
등록 2015-12-01 21:36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석 달 전, 미국의 신경의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가 세상을 떠났다. 신경장애 환자의 다양한 임상 사례를 아름다운 필치로 다룬 그의 대표작 는 1985년 출간돼 전세계에서 널리 읽힌 베스트셀러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시각인식불능증이라는 일종의 인지장애를 가진 음악교사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집어들어 머리에 쓰려’고 했다. 글자 그대로, 아내와 모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 책은 그런 장애를 가진 이들이 평범한 삶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처음엔 경악하고, 그다음엔 미심쩍어하다가, 결국엔 공감하고 감동하게 된다. 올리버 색스의 필력,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보편성 때문이리라.

책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물론 따로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상으로 경이로운 존재가 오늘의 대한민국에 속속 출현하고 있어서다. 먼저 2015년 11월24일 국무회의에서 나온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부터 보기로 하자.

“남과 북이 대치하는 상황인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고, 전세계가 테러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때에 테러단체들이 불법 시위에 섞여 들어와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복면 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슬람국가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얼굴을 감추고서.”

다음날 새누리당 김용남 원내 대변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폭력 시위대와 이슬람국가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고 기존 질서를 무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슬람국가는 총을 사용하고 불법 시위대는 쇠파이프를 사용한다는 정도의 차이점은 있다.”

집회를 여는 자국 시민을 이슬람국가에 가져다 대는 이 행태에 경악한 사람들 중엔 외국 언론인도 있었다. 알라스테어 게일 서울 지국장은 박 대통령의 발언을 자신의 트위터에 링크하고 “진짜야”(Really)라고 덧붙였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발언 직후, 집권여당은 발 빠르게 ‘복면금지법’ 입법을 추진했다. 이 법안에는 대학 입학 전형 시험을 치르는 날에는 시민들의 집회를 금지하고 제한할 수 있게 하는 안도 포함돼 있었다. 일련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나는 처음엔 미심쩍어하고, 그다음엔 경악하고, 끝내 지면에 담지 못할 불경한 욕설을 입에 올리고야 말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자국민을 이슬람국가와 동일시하는 정치가. 둘의 공통점은 인식과 실제 대상 간의 엄청난 격차다. 상식의 지평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무척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판하지 않는다. ‘어떻게 아내를 그런 식으로 대상화할 수 있지?’라는 식으로 논의가 옮겨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장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자국민을 이슬람국가에 빗댄 대통령과 정치인에 분노하게 된다. 저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인식장애에 기인한 게 아니라 ‘의도된 착각’, 즉 마타도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들은 이런 황당한 소리를 저토록 태연하게 입 밖에 꺼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곧장 정권 출범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보인 통치 행위의 특징에 가닿는다. 박근혜 정권의 통치는 철학과 공공선에 기반한 통치가 아니라 정체성과 진영에 기반한 통치다. 그래서 시민을 끝없이 둘로 나눈다. 무슨 짓을 해도 정권를 지지하는 ‘애국시민’과 정권을 비판하는 ‘좌빨-테러분자’로. 주변 정치인도 둘로 나뉜다. ‘나를 따르는 자’와 ‘나한테 욕했던 자’로.

그래서 이 정권은 ‘경청’하는 대신 ‘색출’하고, ‘논쟁’하는 대신 ‘선언’한다. 박근혜의 ‘국민’은, 슬라보이 지제크가 어딘가에서 언급한 ‘완벽한 연인’과 유사한 존재다. “내 연인은 절대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순간 내 연인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 도저한 유아론(Solipsism)이야말로 박근혜 정권의 본질인 것이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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