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부터 날아온 바이러스 전염병이 한국에서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초기 대응의 실패로 한국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감염자 수로 세계 3위에 올라섰다. 이와 같은 풍경은 일견 지극히 ‘현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좀비소설 는 세계화 시대에 국경을 넘는 좀비를 통제하는 데 각국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 바 있다.
문제는 픽션과 현실의 괴리다. 막상 이야기 속에선 모든 나라가 우왕좌왕했는데, 현실 속에선 한국 정부의 대처가 국제적으로도 비난받을 태세다. ‘메르스 비밀주의’가 괴담을 양산하는 가운데 개인들이 ‘메르스 확산 지도’를 만들고 공유하며,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홈페이지에 ‘메르스 상황판’을 공개해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어떤 이들은 재벌기업의 사내 지침을 카카오톡에서 중계하며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역설한다. 국가의 임무가 퇴거한 곳에서 개인과 조직이 아수라장을 벌이는 이 사회의 풍경이 국제적으로도 기괴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우리의 현실은 종종 상상의 기대를 뛰어넘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웹상에선 영화 이 얼마나 지독한 현실의 반영인지를 보여주는 콘텐츠들이 유통됐다. ‘현실의 은유’라 여겨졌던 것들이 ‘날것 그대로의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우리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현실’을 경계하며 대처할 거리감을 상실하고 좌절을 넘어 공황상태에 빠진다. 정부가 정보를 공개하기는커녕 ‘유언비어’를 색출해서 처벌하겠다고 하는 상황은, 우리의 처지가 ‘아직 죽지 않은 현서’를 찾아 사재를 탈탈 털어 산 사제 총을 들고 거리를 헤매는 박강두 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준다.
민주화 이후 우리는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를 몰아냈다고 믿었지만, 그 자리에 다른 공적인 가치를 들여오지는 못했다. 다른 방식으론 ‘국가’를 말하지 못하게 된 정부는 각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탁월한 개인이 되는 것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라 주문했다. ‘애국’은 한우를 먹는 것이나 한국이 나오는 영화에 열광하는 것 등 소비에 관한 문제에 국한됐다. 이익을 구하는 데 탁월한 개인이 가격경쟁력 이외의 요소를 고려해서 소비를 할 때, 그는 ‘애국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박근혜’라는 인물이나 ‘새누리당’이란 특정 정치세력에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난 20년간의 이같은 주문이 민주화에 불만이 있었던 보수세력의 귀환과 맞물릴 때, 공적 기관을 구성하는 이들의 태도를 다르게 변화시킨 측면은 있는 듯하다. 세월호 참사를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순 없더라도, 참사 이후의 대처, 또한 메르스에 대한 대처엔 그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익을 보장하는 것은 공적인 문제이나,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 이익을 구하는 데 탁월한 개인은 국가에서도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우리에겐 그러한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설령 몇 명이 죽어나가더라도 사회는 유지된다는 걸 거듭해서 보여준 한국 사회다. 이런 상황에선 냉소조차 두 개의 차원을 지니게 되는데, 하나는 정부와 사회의 무능에 대한 냉소일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는 것 없이 개인들의 분투의 총합이 어떻게든 사회를 유지해나갈 거란 지점에 대한 냉소일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도주의 권리가 없는 건 단지 국가의 금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후자의 냉소에 도달한 이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들을 도망시키지 않기 위해 서로 분투하는 결과 누구도 도망갈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박강두는 자식을 잃은 뒤에도 한강에서 총을 들고 계속 노점을 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윤형 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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