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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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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에 면역된 듯 내 눈은 곧 무감해졌다

⑬ 사진을 찍은 자와 찍힌 자, 20대 미군과 10대 베트남 소녀의 이야기
등록 2014-03-27 17:43 수정 2020-05-03 04:27
1968년 2월12일 오후, 미군 상병 본이 퐁니·퐁넛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미군 병사가 16살 소녀 쩐티득의 부상당한 팔을 치료하고 있다. 이는 사건의 진상을 담은 미군 보고서에 P번 사진으로 첨부되었다. 본 상병이 찍은 사진들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1999년 비밀 해제된 뒤 〈한겨레21〉 2000년 11월23일치(제334호) 표지이야기에 처음 공개되었다.한겨레 자료

1968년 2월12일 오후, 미군 상병 본이 퐁니·퐁넛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미군 병사가 16살 소녀 쩐티득의 부상당한 팔을 치료하고 있다. 이는 사건의 진상을 담은 미군 보고서에 P번 사진으로 첨부되었다. 본 상병이 찍은 사진들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1999년 비밀 해제된 뒤 〈한겨레21〉 2000년 11월23일치(제334호) 표지이야기에 처음 공개되었다.한겨레 자료

나는 사진을 찍었다.

사진작가냐고? 아니다. 나는 군인일 뿐이다. 미합중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베트남에 왔다. 해병 제3상륙전부대 소속인 나는 남베트남 제2의 도시 다낭으로 입국해, 남쪽으로 25km 떨어진 꽝남성 디엔반현 1번 국도에 위치한 연합작전중대 산하 경비대에 배치되었다. 일명 ‘캡소대’라 불린다. 정보 수집과 관측이 주 임무다. 인원은 소대 규모보다 적다. 그래서 ‘마이너스 소대’라는 이름도 얻었다. 미군은 나를 포함해 5명이다. 남베트남 민병대원 26명이 우리를 돕는다.

그날의 촬영은 우연이었다

그날의 사진 촬영은 우연이었다. 오후 1시30분께, 서쪽에 있는 퐁니 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오전 10시30분께 그쪽으로 행군하는 한국군 중대 병력을 보았는데, 그들인 모양이었다. 마을에서 작전을 벌인다고 했다. 민가가 불에 타는 모습이 육안으로 보였다. 시뻘건 연기가 치솟았다. 포 공격을 한 모양이었다. 총성은 끊기지 않았다. 자동소총과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듯했다. 남베트남 민병대원 한 명이 마을에서 부상당한 소년들과 여성 한 명을 부대로 데리고 왔다.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마을 안에 부상자가 더 많을 게 분명했다. 들어가서 구조 활동을 벌여야 했다. 상관인 실비아 중위는 잠자코 있으라고 했다. 여기저기 무전으로 교신한 뒤, 한국군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마을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는 총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1시간30분쯤 지났을까. 오후 3시께 상급부대로부터 퐁니 마을로 들어가라는 무전 명령을 받았다. 나는 카메라를 챙겼다. 평소 베트남전을 사진으로 남겨보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넓은 길을 택했다. 오른쪽에 매복한 적군이 있을지도 몰랐다. 실비아 중위는 “2주 전 이 마을에서 저격수가 공격해 미군 한 명이 부상당한 적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왼쪽 진입로를 선택했다.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나는 카메라 뷰파인더에 오른쪽 눈을 갖다댔다. 처음 도착한 집에서 남베트남 민병대원 한 명이 불을 껐고, 또 다른 한 명은 M16 소총을 오른손에 쥐고 집 주변을 수색했다. 그 장면을 담았다. 완전히 타버린 집도 보였다. 그곳엔 큰 항아리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카메라 셔터를 더듬던 나의 손가락이 불길하게 떨렸다. 왠지 다음엔 심상치 않은 피사체가 등장할 것만 같았다.

예감은 적중했다. 잿더미가 된 집 안에서 사람의 형체 하나가 나타났다. 절반이 넘게 타버린 주검이었다. 반듯하게 누운 주검의 무릎 아래로만 살덩이가 온전해 보였다. 상반신 뼈의 구조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재 같은 것에 덮였다. 옆으로는 나무인지 기둥인지 모를 것들이 쓰러져 있었다. 내 오른손 검지는 반사적으로 계속 셔터를 눌렀다. 역겨움이 코를 쑤셨다. 뼈와 살점이 타는 냄새였다.

주검 대부분 노인·여성·아이들

마을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길을 따라 사방은 논이었다. 넘어진 벼 사이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오른팔 밑에 흰색 삿갓이 놓였다. 나는 물컹한 논바닥에 군화를 신고 들어갔다. 그녀의 오른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사진을 찍은 뒤, 정면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 컷을 더 찍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가슴에 칼자국이 보였다. 유방이 잘렸다. 팔도 잘린 것 같았다. 나는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을 향해 손짓하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사람이 있다. 살아 있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살 수 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또 다른 공터에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주검이 10구가 넘었다. 그들은 한곳에 있었다. 대부분이 죽었는데, 두 명의 심장은 뛰었다. 미군 동료가 이들을 수습하는 모습도 찍었다.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은 살아 있는 이들을 들것에 실었다. 엎드려 누운 여자아이 한 명은 바지가 벗겨진 채 죽었다. 임신한 여자도 있었는데 머리 앞이 날아갔다. 근거리 사격이 분명했다. 어떤 주검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논둑 옆에도, 연못 근처에도 주검들이 나타났다. 끝이 없었다. 뷰파인더 속을 들여다보는 나의 눈동자는 주검에 면역이 된 듯, 아무 느낌조차 없었다.

마을을 돌면서 이상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주검들 주변에 폭격으로 움푹 팬 곳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1시간 전만 해도 한국군이 마을을 포로 공격한 뒤 소총을 난사한다고 추론했다. 착각이었다. 마을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만으로 한국군이 박격포 공격을 했으리라 단정했던 것이다. 실비아 중위가 한국군 쪽에 무전으로 “81mm 박격포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청하는 소리까지 옆에서 듣지 않았던가. 폭격의 자취는 전혀 없었다. 대신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가까운 거리에서 총격을 당하거나 대검에 찔려 죽었다. 젊은 남자의 주검은 없었다. 노인이거나, 여성이거나, 아이들이었다.

주검만 찍지는 않았다. 손과 팔에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에는 이상이 없었던 소녀의 모습을 찍을 수 있어 기뻤다. 두 팔과 손가락에 큰 출혈이 있었고 미 해병대원들이 응급조치를 한 뒤 병원으로 보냈다. 아, 바로 이거다. O번과 P번 사진이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아주는 장면을 머리 위에서 촬영했다. 앳된 소녀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하얀 상의를 입었고, 왼쪽 손목에 앙증맞은 팔찌를 세 개나 둘렀다. 멋내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손과 팔의 상처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불구가 되었을까.

나는 사건 5일 뒤인 2월17일 다낭에 있는 상급부대에 불려가 이상의 내용을 진술했다. 조사관인 캠퍼넬리 소령이 그날 보고 겪은 일을 빠짐없이 말하라고 명령했다. 소령은 내 이야기를 토대로 진술서를 작성했다. 내가 찍은 사진도 진술서에 첨부했다. 총 20장이다. 사진 설명도 적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나는 사진에 찍혔다.

그렇다. O번과 P번 사진에 나온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곧 다낭병원에 입원했다. 키가 큰 미군장교가 베트남어 통역관을 대동하고 병원으로 와 말을 걸었다. 얼마나 다쳤냐고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는 내가 말하는 대로 적었다. 손과 팔에 총상을 입었지만, 손가락이 두 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다. 죽은 가족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다.

그날 한국군들이 내가 사는 퐁넛 마을로 왔다. 그들은 집에 있던 마을 주민들보고 전부 나오라고 했다. 집 땅굴에 숨었던 사람들까지 전부 찾아내, 다른 장소로 이동하라고 했다. 통역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은 통하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손짓뿐이었다. 그들은 총을 들고 말했다. 따르지 않으면 죽일 것 같았다. 어떤 장소에 이르자, 그들은 민가로 들어가 사람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밖에 있던 우리는 겁에 질렸다.

한국군은 우리를 향해서도 총부리를 들이댔다. 내 주변에 있던 아줌마와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나도 함께 넘어졌지만, 다행히 총알에 맞지는 않았다. 죽은 척해야 했다. 한국군 병사 한 명이 내가 살아 있음을 눈치채고 다가왔다. 나는 손을 모아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는 매정하게도 방아쇠를 당겼다.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어떤 미군이 내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또 다른 미군은 내 오른쪽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살았지만, 엄마·아빠와 남동생 두 명이 죽었다. 3개월짜리 여동생은 부상당한 것으로 안다. 슬픔을 가눌 수 없다.

사진을 찍은 나의 이름은 본(Vaughn)이다. 사건 당시 계급은 상병이었다. 나이는 스무 살. 얼떨결에 현장을 목격하고 카메라를 챙겨갔는데, 다녀와서 인화한 사진들이 엄청난 자료로 남을 줄은 몰랐다. 이 사진들은 미군 상급부대 보고서에 첨부된 뒤, 주월미군사령부과 대사관을 거쳐 미 국무부와 국방부에까지 올라갔다. 주월한국군사령부 등 한국의 군 당국에까지 건너갔고, 해병 제2여단 헌병대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당시 퐁니·퐁넛에서 작전을 했던 부대의 장교와 하사관들을 수사하는 자료로까지 활용됐다. 1970년 2월 미 의회의 사이밍턴 청문회를 앞두고 미국이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도 잘 안다.

나는 사건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베트남에서 그 참혹한 사진을 찍은 현장 경험이 내 심성과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2000년 11월 한국 기자가 워싱턴을 방문해 나를 수소문했다는 것도 안다. 그는 사건 발생 30년이 지나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그 사진들을 용케 처음으로 얻었고, 사진에 얽힌 우여곡절을 듣고 싶어 했다. 베트남전참전군인단체에 전화를 걸어 내 연락처를 물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1994년 46살의 나이로.

스무 살, 나는 ‘베트콩’이 되었다

본 상병의 사진에 찍힌 나의 이름은 쩐티득(Tran Thi Duoc)이다. 사건 당시 16살이었다. 나는 11살 때부터 다낭의 부잣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그날 사건을 겪었다. 한국군에 아빠 쩐반꾸(44)는 물론 엄마와 남동생을 둘이나 잃었고, 부상을 당했던 3개월짜리 여동생도 곧 세상을 떠났다. 혼자가 되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살았다. 저녁에 어둠이 찾아오면 집에서 촛불을 켜놓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엄마·아빠를 그리워하며 애달프게 울다가, 이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고민했다. 4년이 지났다. 스무 살이 되어 소녀 티를 벗게 되었을 때 나는 공산당 해방군 지하조직에 들어갔다. 적들은 나 같은 이들을 ‘베트콩’이라 불렀다. 조국의 해방과 통일에 몸을 바치는 여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엄마·아빠의 죽음을 초라하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적의 근거지나 이동로에 몰래 접근해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어느 날 퐁넛에서 조금 떨어진 빈디엔의 남베트남군 초소 근처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실수였다. 폭탄 조작을 잘못해 일찍 터지고 만 것이다. 그 폭탄에 남베트남군이 아무도 죽지 않은 건, 다행이었을까 불운이었을까. 나는 감옥에 끌려갔다. 1975년 4월 해방이 되어서야 풀려났다.

그 뒤 나는 다낭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한 남자의 아내로, 두 딸의 엄마로 살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2001년 5월 한국 기자가 내 사진을 들고 퐁니·퐁넛 마을을 방문했음을 안다. 본 상병이 찍은, 그 붕대 감는 사진 말이다. 한국 기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총상을 입던 그날, 이후 혼자 견디던 하루하루, 베트콩이 되어 겪은 투쟁담, 1975년 해방 뒤의 삶이 궁금했겠지.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세상에 없었으니까. 유방암이 발병했다. 나는 1999년 8월, 47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 사건과 관련한 미군 비밀 보고서에 담긴 두 사람의 진술 내용을 기초로,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섞고 살을 붙여 구성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쩐티득은 지난회에 실린 쩐티득과는 동명이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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