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배가 출렁거렸다.
겨울바다는 싸늘했다. 오다 마코토(36)는 작은 어선 한 척에 몸을 싣고 항구에서 출발했다. 고기를 잡으러 온 것은 아니다. 바다의 정취를 만끽하려는 여행도 아니다. 배는 멀리 나아가지 않았다. 항구 주변에 있는 목표물로 곧장 향했다. 배 위엔 뜻을 같이한 네댓 명의 사내들이 앉거나 서 있었다. 저마다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오다 마코토는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 아, 미군 병사 여러분.” 확성기의 출력은 파도와 배 엔진의 소음을 힘겹게 이겨냈다. 목표물이 가까이 다가왔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탈영 미군, 소련 거쳐 스웨덴행</font></font>1968년 1월21일, 일본 나가사키 북부 사세보항. 섬과 곶의 조화가 천혜의 풍광을 빚어냈지만,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미국의 해군기지로서 군항 역할이 절대적인 이곳에선 날 선 긴장이 흘렀다. 3일 전 미국에서 온 엔터프라이즈호가 정박 중이었다. 이틀 뒤 베트남 통킹만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엔터프라이즈호의 길이는 무려 335.9m였다. 승무원 수가 5250명이라 했다. 갑판 위엔 100여 대의 팬텀기가 보였다. 대학생들은 며칠 전부터 항구 곳곳에서 엔터프라이즈호 기항 반대 시위를 벌였다. 헬멧을 쓰고 각목을 든 학생들은 경찰기동대와 거친 몸싸움을 했다. 오다 마코토는 이런 방법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엔터프라이즈호에 최대한 접근했다. 어선에선 두 개의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그 하나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FOLLOW THE INTREPID FOUR! WE’LL HELP YOU.”
탈영을 돕겠다는 말이었다. ‘인트레피드 포’(INTREPID FOUR)란 또 다른 항공모함 인트레피드호의 네 병사(마이클 린드너, 그레그 앤더슨, 리처드 베일리, 존 바릴라)를 일컫는 용어였다. 그들은 석 달 전 인트레피드호가 요코스카 기지에 정박 중일 때 부대를 이탈했다. 베트남으로의 출항을 눈앞에 두고였다. 오다 마코토는 비밀 네트워크를 통해 이들의 은신과 보호, 밀항과 망명을 지원했다. 1967년 11월11일 요코하마항에서 소련 정기여객선인 바이칼호에 태워 나홋카로 보낸 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스웨덴으로 가도록 했다. 이른바 ‘요코하마 루트’였다.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반대해온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총리는 11월29일 이들을 입국시킨 뒤 1968년 1월9일 거주 허가까지 내주었다. 엔터프라이즈호 선상 병사들 중에서도 인트레피드 4인을 따를 자가 나올지도 몰랐다. 어선 위에서 오다 마코토는 마이크에 대고 영어로 목 놓아 소리쳤다. “엔터프라이즈호 병사 여러분, 베트남 전장에 가지 마세요. 베트남에서 사람을 죽이지 마세요. 탈영하세요. 우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다 마코토는 누구인가. 일본 반전평화단체인 베헤이렌(ベ平連,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의 대표라는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는 먼저 유명한 소설가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라는 장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했고, 1961년 22개국을 세계일주한 뒤 펴낸 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도쿄대 문학부 시절부터 고대 그리스 문학을 탐구하며 자기만의 민주주의론을 확립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이제 일본에서 가장 실천적인 평화운동가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베트남전 베이스캠프가 된 일본</font></font>베헤이렌이 창립된 것은 1965년 4월이다. 그해 3월부터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북폭)이 시작되었다. B52 등 북폭에 참가하는 폭격기들의 발진 기지는 오키나와였다. 일본의 해·공군 기지는 베트남전쟁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그 3월의 어느 날, 오다 마코토는 안면이 전혀 없던 철학자 쓰루미 스케(도시샤대학 교수, 1922~ )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베트남 반전평화단체를 만들려는데, 대표로 참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쓰루미 스케는 베헤이렌의 발기인으로 함께 모였던 정치학자 다카바타케 미치토시(릿쿄대학 교수, 1933~2004), 철학자 구노 오사무(가쿠슈인대학 교수, 1910~1999)와 뜻을 모은 상태였다. 1960년대 파벌싸움으로 점철됐던 일본 안보투쟁(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에 참여한 운동조직과 거리를 둔 참신한 인물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젊은이에게 인기가 많은 셀러브리티여야 했다. 공산당과의 관계는 물론 학생운동에도 발을 담그지 않았으나,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오다 마코토가 제격이었다. 본인도 2~3분 만의 통화 끝에 기꺼이 제안을 수락했다. 1945년 오사카 대공습을 몸소 겪은 그였다. 몸서리쳐지는 폭격의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베트남 북폭에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베헤이렌 대표로 활동하며 이 운동의 설계자로, 사상의 기둥으로, 실천운동의 구심으로 우뚝 섰다.
다시 1968년 1월21일의 사세보항. 오다 마코토의 본래 계획은 어선이 아닌 헬리콥터를 빌리는 것이었다. 하늘 위에서 엔터프라이즈호 미군 병사들을 향해 삐라를 뿌리며 탈영을 권고하는 화려하고 압도적인 장면을 상상했다. 블록버스터급 데모를 기획하고 싶었다. 작가 특유의 상상력이었다. 항공회사에 연락했다. 군사기지 구역이라 헬리콥터 임대가 안 된다는 답이 왔다. 대신 빌린 어선에선 삐라를 멀리 보낼 수 없었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쳤지만 잘 퍼져나가지도 않았다. 어선 시위는 초라했다. 그래도 확신을 가졌다. ‘미군은 또 탈영할 거야.’
오다 마코토는 1966년 12월10일을 떠올렸다. 요코하마의 요코스카 기지 정문 앞에서 ‘미군 병사에게 보내는 일본의 편지’라는 4쪽짜리 영문 삐라를 처음 뿌린 날이다. 베트남전쟁이 왜 추악한지를 밝히고, 병사들이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상관에게 반전 편지를 쓰고, 사보타주하고, 탈영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라는 내용이었다. 삐라 배포는 오키나와의 즈케란 기지, 도쿄의 다치카와 기지, 야마구치의 이와쿠니 기지로 확대되었다. 일본 내 각 미군기지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뒤 귀국길에 들르는 병사들의 휴양지이기도 했다. 300여 개 지역조직으로 불어난 전국의 베헤이렌 회원들은 자발적이고도 헌신적으로 이 운동에 동참했다. 오다 마코토는 신이 났지만 ‘설마…’ 했다. 정말 삐라를 보고 미군들이 탈영할까? 1967년 10월26일 요코스카 기지를 빠져나온 ‘인트레피드 4인’이 눈앞에 나타나자 오다 마코토 역시 깜짝 놀라지 않았던가. 신호탄이었다. 온다, 또 온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피해자여서 가해자가 된 젊은이들</font></font>그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오다 마코토는 어린 시절 고향 오사카에서 무수히 보았던 황군(일본군) 병사들을 생각했다. 동네 형들은 소집 영장을 받고 중국과 아시아·태평양 전선으로 끌려갔다. 적을 파괴하고 죽이기 위해 동원된 그들은 가해자였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그 짓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였다. 미군들도 다를 바 없었다. 베트남에선 가해자였지만, 죽이라는 명령을 강제받는다는 점에서는 피해자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었다. ‘피해자=가해자’의 무서운 악순환 고리를 탈영병 지원을 통해 끊으려 했다.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국가권력이라는 가해 세력에 명확한 반격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다 마코토가 창안한 이 ‘피해자=가해자’론은 베헤이렌 활동의 핵심 논리가 되었다.
짐작대로, 탈영병은 또 왔다. 1968년 2월과 3월 필립 갤리코트, 마크 샤피로, 에드윈 아네트, 테리 위트모어 등이 베헤이렌을 찾아 보호를 요청했다. 이들은 인트레피드 4인이 간 ‘요코하마 루트’ 대신 훗카이도 최동단 네무로에서 어선을 타고 소련으로 건너간 뒤 모스크바를 경유해 스웨덴으로 향하는 ‘네무로 루트’를 이용해 1968년 4월 망명에 성공했다(여기엔 한국 입양인 출신 미군 병사 김진수도 동행했다. 김진수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룬다). 베헤이렌 내에 새로 생긴 ‘반전 탈주 미군병사 원조 일본기술위원회’(JATEC·Japan Technical Committee for Assistance to Us Anti-War Deserters)가 이들을 도왔다. 은신과 도피, 망명의 ‘기술’을 개발하는 비공개 전문그룹이었다. ‘JATEC’는 1971년 7월까지 18명의 탈영병을 외국으로 망명시켰다. 국경을 초월한 이 활동은 불법이 아니었다. 미-일 안보조약에 기초한 미군지위협정을 유권해석하면, 일본인이 미군 병사를 외국으로 보내는 것은 전혀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무의미한 죽음을 막아야 했다. 그는 이것을 ‘난사’(難死)라고 정의 내렸다. 난사의 사상. 오다 마코토가 1965년 1월 이라는 잡지에 발표하며 정립한 평화운동의 사상체계였다. 1974년 1월 해체될 때까지 반전평화운동을 벌인 베헤이렌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란 사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생활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거룩한 죽음’(玉碎·옥쇄)이 아니라 ‘난사’에 불과했다. 1945년 오사카 대공습 때 모모다니역 부근의 집 뜰 방공호에 숨어 바들바들 떨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았다. 1958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유학한 하버드대학의 도서관에서, 그는 13년 전 악몽의 의문을 풀고 싶어 옛날 가 담긴 마이크로필름을 뒤졌다. 마침내 1945년 6월15일 B29기의 오사카 대공습 항공사진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도시는 소이탄 연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상적 원점이 되었다. 아비규환의 도시 속에 보이지 않는 자신이 있었다. 일생 동안 짊어지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보였다. 폭격의 본질은 새의 눈으로 보는 ‘조감도’(鳥瞰圖)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보면 폭격은 불꽃놀이처럼 황홀했다. 땅 위 벌레의 입장에서 볼 땐 끔찍했다. 이른바 ‘충감도’(蟲瞰圖)였다. 그는 새가 아닌 벌레의 편에 서서 싸우기로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조감(鳥瞰) 말고 충감(蟲瞰)하라</font></font>다시 1968년 1월21일의 사세보항. 항구에 어둠이 찾아왔다. 오다 마코토를 태웠던 어선은 철수했다. 베트남 출항을 앞둔 엔터프라이즈호 병사들이 선실에서 잠이 들 무렵, 대한민국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러 왔다가 실패한 뒤 도주했다. 각각의 국가권력으로부터 싸움을 명령받은 ‘피해자=가해자’들이 벌레처럼 나가떨어졌다. ‘난사’였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났다. 1월23일, 엔터프라이즈호는 천천히 움직여 사세보항을 떠나 베트남 통킹만으로 향했다. 항해 도중 한반도 동해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던 미군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의해 납치됐다는 긴급 정보가 날아들었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선수를 틀었다. 북한 원산항 해역으로 북진해 그곳에서 무력시위를 했다.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벌레’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난사’를 막으려는 오다 마코토의 몸부림이 암흑 속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였다.
그 뒤: 오다 마코토는 197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지하 시인에 대한 석방·구명을 통해 한국과도 인연을 맺었다. 1980년대엔 베이징과 베를린, 뉴욕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생활하다 1994년 고향 오사카로 돌아와 시민운동의 최전방에 섰다. 1995년 고베 지진 피해자들의 국가 지원을 관철시킨 ‘고베 시민·의원 입법운동’은 대표적이다. 아시아의 핍박받는 시민운동 지도자들을 위한 지원과 국제민중법정 등 국제연대운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왕성한 저작 활동으로 무려 152권의 시·소설·평론·에세이집을 남겼다. 한국으로 치면 그는, 황석영 같은 소설가이자 함석헌 같은 사상가, 박원순 같은 시민운동가의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2007년 7월30일. 오다 마코토는 75살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일본 <nhk>이 제작한 오다 마코토 특집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1951~)는 그에 관해 “전후 일본이 지녔던 민주주의와 평등, 평화주의의 가치를 온몸으로 실현한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다씨는 언행일치가 성공한 지식인의 표본이었다”는 추도문을 보내왔다. 장례식을 마친 이들은 도쿄 거리에서 데모를 했다. 장례식 직후 조문객들이 고인의 생애를 기리며 데모한 건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1905~80) 이후 처음이었다. 2013년 11월9일 오사카에서 필자와 만난 재일조선인 부인 현순혜(61)씨는 “남편은 세계의 그 어떤 권위자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건 늘 똑같은 태도로 대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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