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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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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거기 있다

등록 2014-01-24 15:12 수정 2020-05-02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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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우리의 ‘과거’였다. 실밥이 날리는 작업대 앞, 탁한 공기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하루 12시간을 버티고 앉아 미싱을 돌렸다. 손에 쥐는 돈은 한 달에 고작 9500원. 분노한 이들은 힘겹게 싸움을 시작했다. 1970년대 서울 동대문 청계시장 봉제노동자들의 삶은 40년 세월을 건너뛰어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시에서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었다. 2014년 이틀째, 캄보디아 프놈펜 남쪽에 있는 카나디아 공단엔 100여 명의 봉제노동자들이 모였다. 최저임금을 올려달라며 춤을 추는 ‘시위’를 벌였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내 헌병들의 곤봉이 날아들었고, 불행하게도 유혈 사태로 번졌다. 다음날 공수부대원이 쏜 총에 맞은 노동자 5명이 활짝 피워보지도 못한, 꽃다운 삶을 마쳤다. 엿새 뒤, 방글라데시 남부 항구도시 치타공의 한국수출가공공단(KEPZ)에 있는 영원무역 신발제조공장 앞도 순식간에 비극의 무대가 됐다. 이곳에서 시위를 벌이던 5천여 명의 봉제노동자들에게도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한 여성 노동자의 삶을 무참히 앗아갔다.
그곳은, 동시에, 우리의 ‘현재’다. 비극의 직접적 실마리를 유독 한국 기업이 제공한 것은 분명 아닐 게다. 경쟁에 내몰리고 수익성을 중시해야 하는 기업의 처지에선 노동자의 임금을 무작정 올려주기 힘들다는 억울함을 호소할 법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국 기업들의 인권경영 감수성을 경고하는 신호음은 한국 기업이 발을 디딘 세계 곳곳에서 거듭 울리는 중이다. 마치 청계천 봉제노동자들을 억눌렀던 군사독재 시절의 전근대적 노무관리 전통의 잔재가 고스란히 보존돼 수출된 격이다. 특히 캄보디아의 유혈 사태를 두고 한국 기업과 현지 대사관이 공공연히 투자 철수 운운하며 사실상 ‘압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글로벌 업체로 성장한 대표기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이제는 글로벌 무대에서 겨루는 대표기업일수록 ‘보는 눈’이 훨씬 많아진 세상이다. 그만큼 기업 경영의 리스크 자체가 커진 건 당연한 수순이다. 실제 지난해 삼성전자는 세계를 제패한 휴대전화로 곤혹을 치렀다. 휴대전화를 구성하는 부품 속에 들어가는 광물인 주석을, 아동노동으로 악명 높은 인도네시아 방카섬에서 들여온 사실이 밝혀진 탓이다. 국제 인권단체 ‘지구의 친구들’이 관련 조사에 들어간 이후, 1만6천여 건의 항의 전자우편이 회사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브라질에선 처음으로 현지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작업환경이 문제였다.
저임금 노동의 상처는 언젠가, 어딘가에서 또다시 곪아터질지 모른다. 언젠가, 또 다른 어딘가에서 우리의 ‘미래’마저 같은 모습으로 무한 복사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비결은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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