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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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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의 시대는 갔다

등록 2013-06-19 10:49 수정 2020-05-02 04:27

‘격’(格)의 시대는 갔다, 라고 호기롭게 첫 문장을 써놓고 보니, 어딘지 좀 불편하다. 최근 남북 당국회담이 예정일 하루 전에 무산된 것과 관련해, 자칫 북쪽 수석대표의 격을 문제 삼은 우리 정부를 무조건 질타하려는 것으로 섣불리 오해를 사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북한의 3차 ‘핵실험’ 국면을 거치며 한때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까지 내몰렸던 한반도에 모처럼 대화의 기운이 무르익은 판에, 지금 격 따위나 따지고 있을 때냐라는 일부 비판적 목소리를 앞장서 편들고 나서는 것인 양 비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른바 ‘격 논란’에서 어느 한쪽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려는 게 이 글의 본래 의도가 아님을 먼저 분명하게 밝혀두고싶다. 격의 시대가 갔다, 라고 운을 뗀 건, 이번 논란을 지켜보며 평소 격이란 단어와 관련해 품고 있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순전히 격에 대한 개인적 단상에 가깝다. 조금 다른 얘기인데, 이제 취임 100일째를 넘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을 두고 그럭저럭 무난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모양이다. 취임일을 전후해 잇달아 터진 인사 참사의 충격에서도 조금씩 헤어나오는 듯하다. 물론 ‘수첩 공주’ ‘불통 정부’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따라다닐 뿐 아니라 해고노동자 농성 탄압, 경남 밀양 송전탑 건설 강행 등을 두고 실망과 분노의 목소리도 높다. 그럼에도 ‘유신 공주’ ‘독재자의 딸’이란 비난은 ‘대통령 박근혜’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원죄’일 뿐이며, 취임 이후 국정 최고책임자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행실이나 이해관계에 눈먼 세속적 행보로 입방아에 오른 일도 아직은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출발점을 어디서 찾을지 의견이 엇갈릴 수 있겠으나, 사람들 눈에 비친 박 대통령의 일반적 이미지와도 어느 정도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나름의 ‘격있는’ 행보는 분명 하나의 실마리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더욱 짜증나는 일이겠으나, 잠시 전임 이명박 정부 시절을 떠올려보자. 한마디로, 지난 5년은 우리 사회에서 격이 철저하게 무너진 시대였다. 세상은 양의 단계에서 질의 단계를 거쳐 어느새 격의 단계로 훌쩍 뜀박질하고 있었음에도, 오로지 양적 지표에만 매달린 구닥다리 정권은 한껏 높아진 국민의 문화적 감수성을 곳곳에서 무참히 난도질했다. ‘싼티’ 풀풀 나는 정권은 심지어 실용 시대에 어울리는 파격 행보라는 억지소리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가리려 들기까지 했다. 원래 파격이란 격이 무엇인지를 알고 깊이 체화한 뒤에야 나오는 행보라는 단순한 이치를 짐작이나 했을까. 지난 정부 시절 유독 ‘품격’이란 단어가 대중문화 코드로 자주 등장했던 것은 시대를 향한 슬픈 조롱에 가깝다. 이른바 ‘나꼼수’ 등에 쏟아진 이상 열기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팟캐스트 등 미디어 기술과 문법의 변화라는 측면을 잠시 제쳐둔다면, 도통 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권과 그나마 ‘프로토콜’을 맞추기 위한, 눈물겨운(!) ‘저항’(이라고 믿었다)이었다고나 할까.
이제, 격의 시대는 갔다, 라고 말하는 건 과연 섣부른 착각일까? 중요한 건, 우리 사회는 이제 격의 있음과 없음의 단순 구도를 넘어 한 걸음 더 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격은 곧 기본으로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으되,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셈이다. 격 있는 (듯 보이는) 박근혜 정부가 맞닥뜨릴 진짜 도전 역시 이제부터다. 양에서 질로, 질에서 다시 격으로 내달려온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이제 다음 세상을 향한 풍부한 상상력과 알찬 비전이다. 격은 있으되 정작 비전은 없는, 진지하되 콘텐츠가 보이지 않는 건, 분명 또 다른 재앙이다. 어찌 보면, 이번 남북 당국회담을 둘러싼 격 논란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짜 메시지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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