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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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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를 위한 변명

등록 2013-04-14 19:49 수정 2020-05-03 04:27

묻자 답했다. 아니, 따졌더니 냉큼 되받아쳤다, 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게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철학이라는 창조경제 이야기다.
지난 3월30일 열린 당·정·청 회의에서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청와대와 정부 각료들을 향해 “창조경제란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쏘아붙였다. 정작 자신들이 자랑하던 제18대 대통령선거 새누리당 정책공약집에 엄연히 소개돼 있는데도 말이다. 논란이 커지자, 박 대통령은 사흘 뒤 친절하게 ‘개념 정리’를 했다. “창의성을 우리 경제 핵심 가치로 두고 과학기술과 ICT(정보통신기술)융합을 통해 산업과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과 문화가 융합해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란다.
박근혜 대통령이 손수 내린 정의에 비춰볼 때, 새 정부가 구상하는 창조경제의 두 가지 열쇳말은 ‘창의성’과 ‘융합’인 것으로 보인다. 창의성에 방점을 찍는다는 말은, 주류 경제학의 공리를 빌린다면, 아마도 y=f(L, K)라는 전통적 생산함수에서 노동(L)과 자본(K) 이외에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제3의 요소’를 추가한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설령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조차 좁은 의미의 생산활동은 물론이려니와 한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전체 경제체제가 단지 인간의 몸뚱이(L)와 돈(K)의 조합만으로 굴러간 적은 없었다. 융합 역시 마찬가지다. 융합에 빚지지 않은 산업구조의 전환 사례란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20세기 산업의 총아’라 불리는 자동차조차 실상 그 씨앗은 방적산업 등 전혀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분야의 ‘이종교배’로부터 싹텄을 뿐이다. 직물을 짜내는 방적기계의 동력 전달 체제를 끊임없이 개선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공간이동’의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이쯤 되면 박 대통령이 ‘패러다임 전환’이라 추어올린 창조경제란 개념은 모호할뿐더러 새롭지도 않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하다. 과연 그럴까? 내 생각은 오히려 정반대다. 창조경제란 헛된 구호인 양 무시되거나 용도폐기될 게 아니라, 더욱 가다듬고 ‘급진화’시켜야 할 ‘원석’이라고. 오늘날 경제를 창조적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단지 창의력과 융합을 밑천 삼아 생산과정을 혁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창조경제의 진정한 성패는 생산물을 나눠갖는 보다 혁신적인 해법을 찾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한 재벌 총수는 몇 년 전 1명의 천재가 1만 명, 10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천재론’을 설파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기발한 아이디어와 특출한 두뇌 역량의 중요성을 갈파한, 창조경제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총수도, 박 대통령도 눈감은 게 있다. 설령 1명의 천재 혹은 괴짜의 아이디어가 과거 1만 명, 10만 명이 일궈왔던 것과 맞먹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낳는다손 치더라도, 빠른 속도로 자동화·외주화·주변화하는 ‘탈인간화’ 세상은 1만 명, 10만 명이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무대가 되었음을.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회에서는 특정 아이디어의 ‘원작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가려내기란 사실상 힘들다. 세상을 뒤흔드는 아이디어는 전통적 가치와 유산에서 싹트기도 하고, 이른바 집단지성의 산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백수와 실업자를 비롯해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부가가치 생산에) 기여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열매를 ‘누군가’가 온전히 사유화하는 고리를 끊어낼 방안,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가 빠뜨린 치명적 결함이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현대사회의 TV(혹은 영화) 시청자도 엄연히 작품 창작에 기여했으니, 그들로부터 시청료(관람료)를 거둘 게 아니라 응당 그들에게도 수익의 일부를 돌려줘야 한다”고. 이 괴상한(!) 이야기가 한 천재 감독의 요설에 그치지 않는 건, 현대사회의 생산 및 분배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경제가 활력을 잃은 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해서, 다른 분야와의 이종교배에 서툴러서가 결코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불어나는 사회적 부를 구성원들이 나눠갖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실패한 탓이다. 21세기 세상에서 우리가 ‘창조’해야 할 건 창조적 생산론이 아니라, 창조적 분배론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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