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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관계도 꼼수다

등록 2012-02-22 13:18 수정 2020-05-02 04:26

‘위장 대화 공세.’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위한 남북 적십자 간 실무 접촉을 2월20일에 하자는 대한적십자사(한적) 총재의 기자회견을 보고 든 생각이다. “상봉 신청자들이 1년에 4천 명 이상씩 사망하고 있다”는 한적 총재의 말마따나 이 문제는 시간을 다투는 과제다. 그런데 반응이 썰렁했다. 북쪽은 한적의 제안 내용을 담은 전화통지문의 수령을 거부했다. 외교통상부 당국자조차 “국내용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뭐가 문제인가. 무릇 모든 협상은 ‘상호 관심사의 균형 맞추기’에서 시작된다. 신뢰 기반이 취약한 남북 당국 간 협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울러 강자인 남쪽의 배려가 필요하다. 남과 북의 국민총소득(GNI) 격차는 40배 가까이 된다. 그래서 “남북 간 인도적 현안 문제를 협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한적 총재의 기자회견 발언은 문제적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인도적 현안’이라는 표현은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와 사실상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번 제안은 북쪽이 꺼리는, 남쪽이 원하는 것만 얘기하고 싶다는 일방적 주장에 가깝다. 통일부 당국자가 ‘인도적 현안’에 북쪽이 바라는 식량 지원도 포함될 수 있음을 내비치긴 했다. 하지만 정부가 정말로 대북 식량 지원 문제를 논의할 뜻이 있다면 ‘인도적 현안’이 아니라 ‘인도적 관심사’라고 표현해야 했다. 그게 남북의 노련한 회담 일꾼들의 대화법이다.
역사적으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남북관계 개선의 마중물이었다. 상봉장은 눈물바다로 변하지만, 그 눈물의 농도만큼 관계 개선을 바라는 여론은 뜨거워졌다. 전통적으로 북쪽 당국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소극적이다. 북녘의 굶주리는 인민들이 ‘조국을 버리고 남조선으로 떠난 배신자들’(?)의 생활 형편을 부러워하게 될까 부담스러운 게다. 하지만 북쪽 당국은 이런 쓰린 속내를 뒤로 밀치고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대남 협상카드로 적절히 활용해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북쪽에 이산가족 상봉이나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협상을 제안하며 대규모 대북 식량·비료 지원을 함께 다룬 까닭이다. 그렇게 해서 2000년 정상회담 뒤 두 정부의 임기 8년간 이산가족 대면 상봉 행사가 16차례 성사됐다. 이명박 정부 4년 동안엔 두 차례뿐이다.
정부는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고려해 “북쪽이 받아들일 만한 여건이 성숙했을 때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해왔다. 여건이 성숙됐나? 아니다. 그런데 왜? ‘청와대 기획’이 틀림없을 한적 총재의 기자회견일인 2월14일이 실마리다. 북-미 접촉 일정(2월23일)이 공표되고, 중국의 차기 최고지도자인 시진핑 부주석의 방미가 시작된 날이다. 한반도 정세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릴 상황이다. 남쪽 정부가 북쪽이 받지 않을 게 뻔한 이산가족 관련 실무 접촉을 불쑥 제안하는 성동격서 전술로 대화 부재의 책임을 북쪽에 떠넘겨 북-미 접촉에 부담을 주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이 “남쪽은 관계를 개선하려고 열심히 하는데 북쪽이 거부하고 있다는 알리바이용 이벤트”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9월 취임 뒤 “다음 (정권의 첫 통일부) 장관이 일을 할 수 있게 해놓아야 한다”며 ‘유연한 대북정책’을 강조해온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이런 삐딱한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울 게다. 그러나 ‘립서비스’만으로 관계 개선이 되지는 않는다. 당장 통일부는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가 올해 6·15 공동행사를 협의하려고 북측위원회와 중국 선양에서 만나겠다는 접촉 신청을 불허했다. 민간교류 차단이자 6·15 공동선언에 냉담한 이명박 정부의 태도를 재확인한 셈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관계를 개선할 환경이 조성되겠나. 이명박 정부 4년간 남북관계는 충분히 망가졌다. 꼼수는 그만 부리면 좋겠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남북관계를 풀어갈 실마리 정도는 남겨둬야 하지 않겠나.
이제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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