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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부글]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등록 2009-07-21 11:23 수정 2020-05-03 04:25
사진 한겨레 자료

사진 한겨레 자료

‘파열, 누수 또는 상해의 위험이 있으니 (+)(-)를 바르게 넣으시고 충전, 가열 및 다른 전지와 혼용하지 마십시오’. 내가 즐겨 쓰는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에는 이런 경고 문구가 붙어 있다. 그렇다면 2000년대 후반 새롭게 출시된 뉴라이트는 어떨까? 삽질무한 건설머신의 주동력인 뉴라이트는 확실히 별종이다.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는 혼용이 불가능하지만, 뉴라이트는 목적만 맞으면 어떤 레프트·라이트와 섞어 써도 OK다. 재활용도 당연히 가능하시겠다. 뉴라이트를 재활용하면 곧 ‘또 라이트’가 되는데, ‘또 라이트’로서의 뉴라이트 특징은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와 달리 (+)(-) 어디에 꽂아도 잘 굴러간다는 사실이다. 과거 레프트·라이트 인사가 두루 모인 뉴라이트전국연합 일부 인사가 진보를 표방하며 ‘자유주의진보연합’을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뉴라이트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진보를 자처하는 뉴라이트에게 레프트·라이트 양 훅을 동시에 얻어맞은 기분이겠지만, 그럴 때는 뉴라이트가 원래 레프트·라이트를 재활용한 ‘또 라이트’라는 사실을 명심할 것!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는 비록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지만, 그가 세운 공도 있다. 검찰의 ‘스폰서 문화’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10년 전만 해도 부장검사가 부서 평검사와 수사관의 수사비 명목으로 매달 돈을 건네왔고, 회식비와 술값을 충당하려면 ‘스폰을 땡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익명의 검찰 관계자들이 언론에 내놓은 논리였다. 이런 보도를 보며 ‘수사비는 위에서 나올 것이고, 회식이 필요하다면 영수증 제출해서 청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은 나뿐일까. 검사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런데 국회 인사 청문회를 통해 천 후보자의 낙마를 이끈 박지원 민주당 의원에 대해 검찰이 정보 수집 경위와 제보자 등을 내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천 후보자를 포괄적 뇌물 수수 혐의와 위증 혐의로 조사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왔던 것이다. 최근까지 ‘식구’였던 천 후보자에 대해 수사하라는 압박이 가해지면 검찰은 이렇게 외칠지 모른다.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반면 검찰을 욕보인 야당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이렇게 다짐하지 않았을까. ‘그까이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나라당은 결국 언론 관련법을 강행 처리할까? 6월 국회 시한이 다가오며 언론 관련법에 대한 관심도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관건은 김형오 국회의장이 과연 ‘직권상정’이란 독한 카드를 뽑아들 것인가 여부다. 그동안 언론계와 시민사회단체의 반대 노력을 생각한다면 직권상정 카드를 접는 것이 상수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두 인지하고도 ‘인지상정’ 한다면 김 의장은 정치 인생에 커다란 흠집을 내게 된다. 다른 하나의 변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태도다. 박 전 대표는 최근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 대신 여야 합의를 강조했다. 표 대결 양상으로 갈 경우 친박 표의 이탈을 계산해야 하는 한나라당으로서는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나라당과 김형오 국회의장의 언론 관련법 직권상정 움직임을 멈춰달라며 인정상 사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야당과 언론계에서는 커다란 원군을 얻은 셈이다. 이쯤 되면 언론 관련법 직권상정 카드는 그만 사장시키는 것이 인지상정?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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