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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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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던져 날리는 토네이도 액션…최애 ‘블랙 위도우’를 응원해

마블 첫 여성 히어로 나타샤가 선보이는 거울 테마 액션과 연대의 서사
등록 2025-04-24 22:57 수정 2025-04-30 10:31
‘블랙 위도우’ 나타샤와 ‘빌런’ 안토니아가 맞붙는 첫 액션 시퀀스. ‘복사하는 능력’을 가진 안토니아와 나타샤는 거울 액션을 선보인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블랙 위도우’ 나타샤와 ‘빌런’ 안토니아가 맞붙는 첫 액션 시퀀스. ‘복사하는 능력’을 가진 안토니아와 나타샤는 거울 액션을 선보인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액션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해.” 오륙 년 전만 해도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상황이 반전돼 액션 대작이 개봉하길 기다린 건 주짓수를 배우면서부터였다. 한글을 깨친 아이가 간판만 봐도 반갑듯 영화에 아는 기술이 나오면 환호했다. 그리고 남자보다 기술적이고 민첩한 여성 배우의 움직임에 매료됐다.

덕질의 완성은 영업이라던가. 드디어 때가 왔다. 여성이 들러리나 소품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액션 영화가 인기인 지금이 좋아하는 것을 더 널리 알리는 내 영업 활동의 최적기라고 확신한다. 볼거리로만 소비되던 여성의 몸에서 ‘싸우는 몸’을 발견하고 함께 즐길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싸우는 여성의 몸’을 아는 즐거움

영업의 포문은 최애가 여는 법. ‘블랙 위도우’는 구색 갖추기용 캐릭터처럼 등장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키워낸 성장형 히어로로 마블 유니버스의 여러 히어로 가운데 나의 최애다. 영화가 제작돼 개봉일이 확정되기까지 단순히 ‘기다렸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랐다. 나타샤가 ‘아이언맨2’에 처음 등장하고 솔로 무비가 나오기까지 자그마치 11년을 ‘손꼽아’ 기다렸다.

영화의 기본 골격은 가족 드라마다. 나타샤는 ‘위장한 가족’으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여동생 옐레나를 만나 두 사람을 ‘여성 스파이’ 위도우로 길러낸 비밀 기관 레드룸의 음모와 실체를 파헤친다. 레드룸을 습격하기 위해 나타샤는 가짜 가족이라고 외면했던 부모를 다시 만나고 상대의 능력을 복제하는 빌런 안토니아와 위도우 후배들의 위협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다.

영화 전반부에선 고개를 갸우뚱했다. 11년 만에 마블 최초 여성 히어로 블랙 위도우를 내세워 만든 첫 솔로 무비인데 더 거창한 서사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나타샤의 야심과 영웅으로서의 고뇌에 집중해주길 바랐다. 출생의 비밀, 가족 내 불화와 화해로 시작하는 여성 서사라니! 여성과 가족의 안이한 조합은 지루했다.

다행히 액션은 새롭고 수려했다. 블랙 위도우에서 일관되게 쓰이는 액션의 테마는 거울이다. 거울 액션은 나타샤와 안토니아가 맞붙는 첫 액션 시퀀스부터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샤는 자신이 과거에 수행한 작전으로 희생된 줄 알았던 안토니아와 재회한다. 레드룸의 수장이자 아버지인 드레이코프에 의해 기계 인간이 된 안토니아는 상대의 기술을 흡수해서 고스란히 복사하는 능력을 선보인다. 그는 나타샤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하는데 텀블링하듯이 일어나는 나타샤의 전매특허인 ‘겟업 동작’까지 완벽하게 재현한다.

격투기를 배울 때 자주 듣는 말이 ‘어떤 기술을 당해보지 않고는 그 기술을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처음 보는 기술을 쓰면 어떻게 하는지 물어서 배우고 그대로 모사하는 건 매우 기초적인 훈련 방법이다.

거울 액션은 나타샤와 자매지간으로 자랐던 옐레나가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도 돋보인다. 여기서도 둘은 거울 속의 자신과 싸우듯 한 몸처럼 움직인다. 두 사람 다 위도우로 훈련받아서 그렇다고 하기엔 다른 위도우와의 대결에서는 이렇게 거울상처럼 싸우지 않는다. 나타샤는 줄곧 과거를 부정했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움직임에서 친자매보다도 끈끈한 친밀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착취당하는 위도우를 해방하는 액션

거울은 액션의 테마일 뿐만 아니라 나타샤의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를 상징하기도 한다. 1902년 찰스 호턴 쿨리가 처음 제안한 거울 자아는 인간은 타인의 평가와 반응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는 심리학 이론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반응의 주체가 바로 원가족이다. 어려서부터 부정적이고 왜곡된 거울로 자신을 비춰본 사람의 인지는 그만큼 왜곡되기 쉽다.

가족은 나타샤의 삶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친모는 자신을 쓰레기 버리듯 내버렸고 또 가족과 헤어져 강제로 자궁 제거 수술을 시키는 ‘위도우’로 길러져서 ‘엄마’가 되는 방법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도 없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은 나타샤는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고자 레드룸에서 탈출해 어벤저스가 됐다.

홀로 도망쳐 나온 레드룸으로 돌아가 본거지를 파괴하고 세뇌된 위도우들을 해방하는 것이 한 단계 성장한 영웅으로서 나타샤가 완수해야 할 과업이다. 영화 후반부는 레드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전직 위도우인 나타샤 자매와 현직 위도우들의 대결이 압권이다. 둘 다 몸을 던져 회전하면서 상대의 목이나 어깨 관절을 꺾는 기술을 자주 쓴다. 그중에서도 토네이도 디디티(DDT)는 나타샤의 시그니처 액션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타샤는 아이언맨에 처음 등장할 때도 이 기술을 선보였다. 이후 어벤저스의 일원이 돼 활약할 때마다 조금씩 변형된 토네이도 디디티로 시선을 끌었다.

이 기술이 성공하려면 우선 몸을 던져 날다시피 해야 한다. 토네이도 디디티가 프로레슬링에서 자주 등장하는 건 화려하고 과시적이기도 하지만 루프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던지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체조 선수처럼 날아올라 양다리 사이에 상대의 목을 단단히 감은 채 토네이도처럼 회전하다가 방향을 급전환해서 체중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목을 꺾는, 상당한 난도를 자랑하는 기술이다.

토네이도 디디티만큼은 아니지만 주짓수에도 이름에 ‘플라잉’이 붙는 화려한 기술들이 있다.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이런 기술들을 시도하곤 했는데 아직은 역부족이다. 어벤저스가 아닌 나 같은 초보는 상대의 도복 소매를 단단히 붙잡고 골반을 밟으면서 몸을 지탱한 다음 회전하는 식으로 연습한다. 단계별로 세분화한 동작에 익숙해지면 나는 것처럼 몸을 던져야 한다. 난도가 높고 부상 위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동작이다.

현직 위도우들과 싸워 이긴 나타샤를 기다리는 최종 빌런은 안토니아다. 그는 나타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가장 부정적인 거울이다. 나타샤가 주도한 테러전의 피해자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레드룸에서 착취당한 여성이기도 하다. 마지막 대규모 전투 장면에서 나탸사는 공중에서 추락하는 옐레나와 안토니아를 구한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서 ‘독거미’를 뜻하는 블랙 위도우답게 거미줄 같은 낙하산을 펼쳐 두 여성을 살린다. 공격과 제거의 수단이었던 토네이도 디디티가 결말에서는 구원과 연대의 수단으로 변모한다.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

이때의 구원은 영웅이 주도하는 일방적 구원이 아니라 여성 간의 상호 구원이다. 나타샤는 옐레나, 안토니아 그리고 후배 위도우들을 구함으로써 출생과 가족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레드룸에서의 어두운 과거를 극복한다. 운명의 순환을 끊어냄으로써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 것이다. 세뇌에서 깨어난 위도우들이 나타샤에게 ‘이제 우리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타샤는 홍길동처럼 율도국을 세우는 대신 말한다.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온 마음으로 최애를 응원했다. 과거로 돌진해 운명을 바꾸고 착취당하는 이들을 구해낸 거면 충분했다. 다른 거창한 것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결국 서로를 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양민영 주짓떼라·‘운동하는 여자’ 저자

 

*액션 읽는 여자: 여성 주연 영화를 보며 여성의 시선으로 ‘싸우는 몸’을 발견하는 시간. 여성의 몸을 향한 협소한 시선을 확장하는 칼럼.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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