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열기가 타오르던 2002년 6월,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김수환 추기경을 찾았다. 각계 원로를 순방하는 차원이었는데, 이 만남에선 종교 문제가 화제가 됐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 노 후보는 “1986년 부산에서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 쓸 때 종교란에 무교로 쓴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하느님을 믿느냐”고 묻자, 노 후보는 “희미하게 믿는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확실하게 믿느냐”고 재차 묻자, 노 후보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가 “앞으로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다. 이 에피소드는 언론에 보도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대개 선거 때엔 정치인들이 종교 표를 민감하게 의식하는데, 노 후보는 천주교인이란 점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방황하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송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과정도 재미있다. 송기인 신부의 얘기. “86년 부산 미 문화원 사건 때, 변론이 끝나면 (당시 변호인이던) 노 대통령과 저녁을 같이 먹곤 했다. 노 대통령이 와 의 등장인물을 다 외워서 내가 깜짝 놀라자, 그는 ‘이런 머리를 가지고 대학 문도 밟아보지 못했다’고 하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성당은 열려 있다. 성당에서 공부하라’고 권유해 부부가 함께 성당 교리반에 입교했다. 1년을 다녀야 하는데 노 대통령 부부는 딱 4시간만 출석했고, 심사에서 낙제했다. 내가 남천성당 정명조 신부(나중에 주교가 됨. 2007년 선종)에게 “낙제생이 있으니 교리 교육을 시켜서 세례를 주시라”고 부탁했다. 정 신부는 “먼저 세례를 줘서 보내십시오. 그러면 제가 교리 교육을 시키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노 대통령 부부에게 세례를 줬다. 남촌성당으로 옮긴 노 대통령 부부는 정 신부와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게 정 신부가 노 대통령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 송 신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내가 성당에 나오지도 않을 사람에게 세례를 준 셈이 됐다. 성당에 나오시라”고 권유했다. 그랬더니 노 대통령은 “신부님이 제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성당에 다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재임 중에 성당을 찾아 미사를 보거나 청와대에서 종교행사를 연 적이 없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대개 관저에서 혼자 예배를 봤지만 1년에 한두 차례 정도는 구역 성당 신부를 초빙해 함께 예배를 보기도 했다. 이 두 대통령 시절엔 종교로 인한 논란은 거의 없었다.
종교는 역대 대통령의 집권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지만, 한편으론 쉽게 구설에 오를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뜬소문은 단적인 사례다.
김영삼 정부 들어 유례없는 대형 사건이 계속 터졌다. 취임 무렵부터 구포 열차 탈선,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페리호 침몰, 충주호 유람선 화재,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등 초대형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수십 년간 속도만을 앞세운 고도성장의 거품이 한꺼번에 터진 거였지만, 민심은 흉흉했다. “기독교 장로인 김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의 불상을 없애서 사고가 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청와대 관저 뒤편으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높이 1m 정도 되는 석가여래좌상이 있다. 8세기경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경주 남산에 있었는데, 1927년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독 관저(현 청와대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 불상을 없앴다는 소문은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을 정도로 민심, 특히 불교계 분위기를 악화시켰다. 김영삼 청와대는 외부엔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조계종 승려 7명을 초청해 뒷산의 불상을 보여줬다. 유언비어를 잠재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인사는 “청와대 불상을 직접 본 승려 중엔 성철 큰스님의 딸 불필 스님도 있었다”고 밝혔다.
노태우와 10원짜리 다보탑 소문불자였던 노태우 대통령은 정반대의 소문에 시달린 적이 있다. 1987년 대선에서 그가 승리하자,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에 불상을 새겨넣어서 불심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국은행이 직접 나서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에 새겨져 있는 건 불상이 아니라 사자상이다. 처음 동전을 만들 때는 사자상을 빠뜨렸다가 나중에 발견하고 새로 새겨넣은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소문은 잦아들었다.
한국 정치에서 종교 논란이 심해진 건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 대통령이 기독교 장로 출신의 첫 대통령은 아니지만, 다른 정치인과 그를 구분짓는 건 ‘정치인이기 이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사실이다.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인이었다. 정치적 감각이 종교적 표현과 행동 수위를 항상 제약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달랐다. 크리스천인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은 “내가 본 크리스천 정치인 가운데 이 대통령은 가장 독실한 신앙인이다. 그에겐 신앙적 확신이 있다. 정치인이라면 다른 종교를 가진 유권자도 고려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그런 점이 부족했다. 국면마다 불필요한 논란으로 손해를 본 건 그런 탓이 컸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물러난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매우 흡사하다. 두 사람 모두 신앙적 확신을 가졌고, 정치인이기 이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부시는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나선 1996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발언해 첫 종교 논란에 휩싸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취임 직후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말했던 걸 연상시킨다. 둘 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자연스레 나온 발언들이다. 종교를 정책 결정에까지 개입시킨 부시와 비교하면 이 대통령은 온건한 편이지만, 그건 기독교 국가인 미국과 다종교 국가인 한국의 차이에서 온 측면이 컸다.
미국에선 정교 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가 헌법에 기초한 대법원 판례로 확립돼 있다. 1960년 대선에서 승리한 존 F.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첫 비개신교도 대통령이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청교도가 세운 나라 미국에서 비개신교도가 대통령이 된다는 건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케네디는 선거 유세 때 “나의 종교적 믿음은 국정운영에 전혀 개입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두 가지가 충돌한다면 종교를 버리겠다”고 약속했다. 종교는 미국 정치의 전면에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였다. 정치 영역에서 종교가 다시 부상한 건 보수주의의 확산과 관련이 있다. 1980년대 이뤄진 보수주의의 급격한 성장 배경엔 복음주의 단체들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 내 최대 복음주의 단체의 하나로 꼽히는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 설립자 제임스 돕슨 박사의 홍보영화엔 공화당 대통령 3명이 등장해 그의 활동을 칭찬한다. 로널드 레이건(1981~89)과 아버지 부시(1989~93), 그리고 조지 부시(2001~2009)다. 조지 부시는 종교적 측면에서 레이건이나 아버지 부시를 훨씬 뛰어넘었다. 기독교 우파 지도자인 리처드 랜드 박사는 인터뷰에서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 공화당 정권에서도 (레이건 백악관이나 아버지 부시 백악관은) 우리 전화를 받고 때론 응답 전화를 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먼저 우리에게 전화를 건다. 그들은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먼저 묻는다.”
부시 표 40%는 백인 복음주의자, 한국은…부시는 백악관에 입성한 뒤 2003년 인터뷰에서 “매일 아침 성경과 찰스 스탠리의 기도문을 읽는다. 성경은 사랑과 연민을 이야기한다. 그건 나에게 큰 위안을 준다”고 고백했다. 또 “성경이 나에게 에이즈 정책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토로했다. 부시가 백악관에 설치한 ‘믿음에 기반한 공동체 이니셔티브 부서’(OFBCI·Office of Faith-Based and Community Initiatives)는 집권 8년 내내 ‘정교 분리 원칙’을 위반했다는 논란에 시달렸다. 부시는 인신매매나 에이즈 정책과 같은 문제들을 결정할 때 우파 기독교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측근 참모들의 의견 이상으로 그들의 얘기를 중요하게 청취했다. 복음주의단체 지도자인 척 콜슨은 인터뷰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백악관 모임에 참석한 뒤 부시에게 다가가, 믿음에 기반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부시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술주정뱅이일 것이다. 나는 믿음에 기반한 행동이란 게 뭔지를 안다’고 대답했다.”
복음주의 세력은 부시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부시가 2000년 대선에서 얻은 표의 40%는 백인 복음주의자들이란 통계도 있다. 2004년 부시의 재선도 중소도시 복음주의자들의 압도적 지지 덕분이었다. 우파 기독교 세력의 열정적 지지라는 측면에선 이명박 대통령도 부시와 흡사하지만, 이 부분은 종종 가볍게 지나쳐버린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이 대통령을 지지했는지, 개략적으로라도 유추할 수 있는 통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7년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인사들은 “이명박 바람이 처음 일어나는 데 교회의 역할이 컸다. 한나라당 경선 승리와, 대선 본선에서 수도권의 압도적 승리를 이루기까지 과거 어느 선거보다 열정적이었던 기독교 신도들의 자발적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MB(이명박)계의 핵심으로 분류되는 한나라당 의원의 얘기. “박근혜 전 대표와의 경선을 앞두고 호남에서 MB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진원지는 교회였다. MB는 서울시장을 그만둔 뒤 교회를 다니며 수많은 간증을 했다. 그의 간증은 신앙적으로 매우 감동적이었다. 교회들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이유에서 MB 간증 테이프를 대량으로 만들어 신도들에게 돌렸다. 호남에서도 이 테이프들이 많이 돌아다녔다.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호남의 보수 성향 목사들이 공개적으로 MB 지지를 선언한 건 이런 맥락에서였다.”
MB와 부시가 쉽게 친해진 데에 신앙이 중요한 매개가 됐으리란 걸 여권 관계자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2008년 4월 워싱턴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하룻밤 묵으며 부시와 신앙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여권의 핵심 인사는 “부시와 MB는 종교적으로 통했고, 이것이 독도 문제 등에서 부시가 몇 차례 MB를 파격적으로 도와준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실한 신앙인과 기독교 정신부시가 2000년 대선 슬로건으로 내건 ‘따뜻한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는 사랑과 연민에 기반한 기독교 정신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부시 집권 8년간 미국 사회는 따뜻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분열이 극심해졌다.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 사회 모습도 별로 다르지 않다. 독실한 신앙인 대통령 아래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역설적이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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