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2월20일 청와대 관저 신축 공사장 바로 뒤편 수풀 속에서 글씨가 새겨진 표석이 발견됐다. 그동안 짙은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신축 공사 과정에서 비로소 사람들 눈에 띈 것이다. 화강암 암벽을 깎아 만든 가로 250cm, 세로 120cm 크기의 이 표석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청와대는 금석학 대가 임창순(1999년 사망) 옹을 모셔다 글씨 감정을 부탁했고, 임 옹은 300~400년 전에 글씨가 쓰여졌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청와대는 옛 본관 터에 ‘천하제일복지’라고 쓴 표석을 세웠고, 이 사진은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올라 있다. 그러나 실제로 수백 년 전에 이 표석이 세워졌는지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표석 발견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인사는 “표석이 조선시대에 세워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일제시대 때 이곳에 조선총독 관저를 지으면서 표석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추정만 있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풍수학의 대가로 꼽히는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조선시대엔 지금의 청와대 터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었다. 특정 지점에 표석을 묻어놓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게 하는 건 대원군이 많이 썼던 일종의 정치적 수법”이라고 말했다.
“형식에 압도돼 궁중문화에 젖는다”청와대 자리가 명당이란 주장은 오래전부터 풍수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제기됐다. 고려시대 숙종 9년에 왕실의 이궁(離宮)을 현 청와대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백 년 전부터 청와대 터를 길지(吉地)로 여겼다는 뜻이라고 청와대 홈페이지에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그곳의 주인만 되면 권위주의적 인물로 바뀌는 청와대 터는 문제가 많다”고 말한다. 주산인 북악산이 수려하지만 규모가 인왕산에 비해 작아, 이런 곳에 외로이 오래 거주하다 보면 왜소한 독불장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 전 교수는 “이건 풍수학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환경심리학적 해석”이라며 “청와대 지대가 꽤 높아 이곳에선 남산과 서울 시내를 모두 굽어볼 수 있다. 대통령이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데, 실제로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꼭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청와대는 흔히 구중궁궐에 비유된다. 권부의 상징이란 뜻도 있지만, 국민과 떨어져 권위의 벽에 갇혀 있다는 뜻도 담겨 있다. 실제 청와대에서 근무한 많은 인사들은 본관이 ‘조선시대 왕이 살던 대궐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박준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본관에서 일하다 보면 그 내부 장식과 형식적 웅장미에 압도돼 저절로 궁중문화에 젖기 쉽다”고 말했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본관은 전통 목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지었다”고 소개했다. 2층 본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단층의 별채를 배치했고, 우리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 있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렸다. 지붕 위엔 청기와를 씌웠는데, 그 수가 15만 장에 이른다.
전통적인 팔작지붕을 올린 점을 비롯해, 건축학적으로 청와대 본관의 가치는 상당히 높게 평가된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 참모들을 가까이 두고 싶어 본관 구조를 바꾸는 방법을 고려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전문가들에게 자문한 결과, 현 본관은 조형미 측면에서 잘 지은 건물이란 평가를 들었다. 내부 구조를 바꾸면 그 조형미가 사라진다는 판단에서 구조 변경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큰 운동장만 한 방에 책상만 덩그러니그러나 실용성 측면에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 본관(1989년 완공)은 건설 당시 청와대 비서실의 요청으로 수차례 설계 변경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공사비가 치솟았지만 청와대는 시공사인 현대건설에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것 때문에 노태우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 회장의 관계가 냉랭해졌다고 한다. 청와대 본관은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경복궁을 잇는 일직선상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인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서울역 쪽에서 올라오는 센 기를 피하기 위해 약간 비켜서 위치를 잡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경호실은 경호 차원에서 본관의 내부 구조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청기와가 깔린 팔작지붕의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한겨울에 쌓인 눈이 살짝 녹으면서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마침 순찰 중이던 경호실 요원이 다칠 뻔한 사고도 있었다.
대통령실이 형식적 웅장미를 갖춘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미국도 처음 백악관을 지을 때 어떤 형식으로 지을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유럽 봉건왕조 지배에서 독립한 신생국의 많은 인사들은 새로 지을 대통령실이 왕궁을 연상시키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제임스 호반의 설계안을 받아들여, 아일랜드의 레인스터 공작 저택을 본뜬 크고 호화로운 건물을 짓는 걸 밀어붙였다. 대통령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청와대 본관 역시 과거 궁궐의 형식미를 따른 점에선 백악관과 비슷하다. 하지만 오직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란 점이 다르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임기 말엔 국민과 멀어진 채 극심한 정치적 위기를 겪은 데엔, 청와대의 구조가 적잖은 역할을 했다. 본관이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다 보니, 그 웅장한 규모에 비해 방 수가 적고 대통령의 동선(動線·걸어서 움직이는 행로)이 길다. 경호실이 본관 구조에 불만을 표시한 이유 중 하나도 동선이 길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이 하루 종일 업무를 보는 집무실에 대해,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사는 “큰 운동장만 한 방에 대통령 책상과 회의용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흡사 절간을 연상시킨다”고 표현했다. 누구나 청와대 본관에 들어서면 그 웅장한 구조에 위압감을 느낀다. 2층 계단을 올라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면 긴장은 극에 달하게 된다. 어느 장관이 집무실 문을 열고 대통령 책상 앞까지 가는 도중에 너무 긴장해 오줌을 쌌다는 일화가 그럴듯하게 나돈다. 그러니 대통령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
지금의 청와대는 국민뿐 아니라 참모들로부터도 대통령이 고립돼 있는 구조다. 리처드 닉슨부터 빌 클린턴까지 30여 년간 백악관 보좌관으로 일했던 데이비드 거겐(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은 저서 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직접 만났을 때의 강렬한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70년대 초, 백악관 말단 보좌관이던 그는 연설 원고를 전하러 밤늦게 백악관 볼링장으로 닉슨을 찾아갔다. “대통령은 (놀랍게도) 혼자서 볼링을 치고 있었다. 닉슨은 잠시 동안이지만 권력의 올가미를 벗어던진 듯했다. …나는 그날 밤 그에게 매료됐다.”
우리 청와대에선 이런 광경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청와대 행정관은 물론 비서관들도 대통령을 마주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공간적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비서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실 건물인 위민관에서 대통령이 집무하는 본관으로 가려면 경비 초소를 2개 거쳐야 한다. 거리는 500m 정도, 걸어서 5분가량 걸린다. 본관에 보고하러 올라가는 수석비서관들은 대개 차량을 이용한다. 이런 상태에선 대통령이 여러 명의 참모를 불러놓고 피자를 시켜 먹으며 구수회의를 여는 백악관 풍경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Oval Office)가 참모들의 방과 바로 붙어 있고 백악관 뜰인 로즈가든으로 곧바로 나갈 수 있는 개방형 구조라면, 청와대 본관은 참모들의 접근조차 어려운 폐쇄형 구조인 셈이다.
1998년 2월 청와대에 입성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문제점 때문에 집무실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두려 했지만, 경호 문제로 포기했다. 경호실에선 “대통령 안전도 안전이지만, 정부종합청사를 드나드는 시민들의 불편이 매우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 밖으로 이동하는 대신에, 내부 구조를 바꾸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정권의 핵심 인사들로부터 ‘대통령은 외롭다. 구중궁궐에서 혼자 지낸다’는 말을 많이 들어 두려움이 컸다고 한다. 또 그가 청와대에 입성(2003년 2월)할 무렵 미국 드라마 이 국내에 방영됐다. 노 대통령은 여기 나오는 것처럼 참모들과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격의 없는 회의를 하고 싶어했다. 청와대 본관의 내부 구조를 바꾸라는 지시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러나 건축학적 가치를 이유로 본관 개조를 포기하고, 대신 본관 가까이에 비서동을 하나 더 신축했다. ‘위민1관’이라고 부르는 건물인데, 비서동 3개 중 유일하게 청와대 안뜰인 녹지원 쪽에 대통령 전용 출입구를 만들고 대통령 집무실도 하나 마련했다. 대통령이 수시로 이 비서동에 들러 참모들과 만나고 직접 집무도 할 수 있도록 꾸민 것이다. 위민1관이 지어진 초기엔 노 대통령이 자주 이곳을 이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청와대 본관 집무실로 다시 회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주일에 서너 차례 위민1관의 대통령 집무실로 내려와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들의 보고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간 배치가 중요한 이유는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니다. 거리가 멀면 참모들과 신속하고 원활한 대화를 하기 어려워진다. 참모들과 쉽게 만나지 못하면 대통령 혼자서 또는 극소수의 측근들만 불러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말처럼,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모든 사안을 다 꿰뚫어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대통령은 훨씬 더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정책 결정에 휩쓸리기 쉬워진다.
대통령과 국민, 대통령과 참모의 거리를 좁히는 문제는 여전히 청와대의 숙제로 남아 있다. 정치적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은 더 외로움을 느낀다.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청와대 집무실로 이명박 대통령을 방문했던 한 인사는 본관 부속실 직원들로부터 “자주 대통령을 찾아와 얘기를 해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박찬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