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4월 쿠바 피그만 침공사건의 실패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커다란 충격과 모멸감을 안겨줬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군 1500여 명은 피그만에서 모두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망명군이 상륙하면 쿠바 인민들이 내부 봉기로 호응하리라 생각했던 건 미국의 착각이었다. 피델 카스트로 혁명정권은 예상보다 훨씬 견고했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됐다.
백악관에 입성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케네디는 많은 걸 깨달았다. 그는 CIA나 국방부, 국무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만으론 정확한 상황 판단이 어렵다는 걸 알았다. 밑바닥의 정보와, 부처 벽을 뛰어넘는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그해 5월 케네디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는 해군건설대를 동원해 비밀리에 백악관 지하실 개조작업을 벌였다. 백악관의 위상을 새롭게 바꾼 상황실(Situation Room)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국방부 산하 육·해·공 각 군과 해안경비대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24시간 배치됐고, CIA 분석관이 상주했다. 국무부 산하 해외 대사관과 CIA 해외지국들,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 위성·통신 정보를 총괄하는 국가안보국(NSA) 등에서 나온 정보가 집결하는 명실상부한 ‘정보의 허브(Hub)’가 백악관 지하실에 마련된 것이다.
상황실의 탄생은 백악관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과거 중앙정보국장과 국방부·국무부 장관만 알고 있던 정보를 백악관 참모들이 먼저, 더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백악관이 부처의 정책결정에 더 깊숙이 개입하는 게 가능해졌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대통령 자문기구를 벗어나 권력의 핵으로 탈바꿈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앤서니 레이크는 (Our Own Worst Enemy)이란 책에서, 백악관 상황실과 상황실의 통신시스템 덕분에 대통령이 대외정책 시스템을 통제함으로써 참된 의미에서 ‘대통령 중심의 국정운영’이 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힘이 정보를 빨아들이고, 그렇게 장악된 정보는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상황실은 권력의 이런 속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2003년 청와대 지하벙커에 국가안보회의(NSC) 상황실이 처음 문을 열기 이전에도, 청와대엔 상황실이 있었다. 경호상황실이다. 지금의 NSC 상황실이 국정운영의 중추신경계라면, 경호상황실은 정권 안보의 중추신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경호상황실은 청와대 경호실 건물 지하에 있었다. 말이 경호상황실이지, 사실상 국정상황실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 시절, 경호실은 단순히 대통령 경호만 맡는 기관이 아니었다. 정권 안보의 최첨병이었고, 경호실장은 권력의 2인자였다. 3공의 박종규·차지철 경호실장이 그랬고, 5공의 장세동 경호실장, 6공의 이현우 경호실장이 그랬다. 상대방을 가리켜 ‘임자’라는 호칭을 즐겨 썼던 박정희 대통령이 유일하게 ‘아무개야’라고 이름을 불렀던 두 사람이 바로 박종규와 차지철이었다. 장세동 실장은 한때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꼽혔고, 이현우 실장은 노태우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관리했다.
정상끼리 통화하면 누가 먼저 전화 걸까전직 경호실의 고위 인사는 “5·6공 때까지만 해도 경호상황실은 막강했다. 육군 대령이 상황실장을 맡았는데, 이 자리는 진급 코스였다. 주로 ‘하나회’(군사정권 시절 주요 요직을 독차지했던, 주로 대구·경북 출신 육사 장교들로 구성된 군부 내 사조직) 출신 장교들이 왔다”고 말했다. 경호실 지하벙커의 벽엔 육·해·공군과 경찰, 서울시의 상황판 5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시시각각 발생하는 상황을 기록했다. 휴전선을 비롯한 전방 군 상황은 물론이고, 서울 시내 대학의 시위 상황도 주요한 기재 내용 중 하나였다. 경호실장은 매일 아침, 상황실에서 취합한 보고서를 들고 대통령 관저로 올라갔다. 경호실장 보고가 비서실장보다 풍부했고 정확했다. 경호상황실에서 군과 경찰, 내무부의 직보를 받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직 경호실 인사는 “당시엔 경호실장이 주말마다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과 보안사령관(현 기무사령관), 특전사령관을 불러 테니스를 치고 삼청동 안가에서 회식을 하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호상황실의 힘이 빠진 건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부터다. 민간 정치인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은 경호실이 군과 경찰을 장악하며 보고를 올리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김 대통령은 오히려 경호실에서 군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선 비서실 산하에 국정상황실을 두고, 여기서 치안을 비롯한 국내 상황을 종합 점검했다. 이 시기에 현역 대령인 경호실 상황실장이 처음으로 장성 진급에서 탈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호상황실의 몰락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지금도 경호상황실은 존재하지만, 이젠 오로지 대통령 경호와 관련한 상황만 담당할 뿐이다.
백악관 상황실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대통령과 외국 정상 간 통화를 준비하는 일이다. 외국 정상과의 통화가 준비되면, 대통령은 지하 상황실로 내려와 수화기를 건네받는다. 우리나라에선 대통령과 외국 정상 간 통화는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이 관리한다. 한-미 간 정상 통화 때는 시차 때문에 주로 밤늦게 관저 집무실에 설치된 비화기(秘話機·음성을 암호화해 도청을 방지하는 장치) 전화를 활용해 통화를 한다.
한-미 정상이 통화를 하면, 누가 먼저 전화를 걸까. 청와대와 백악관 발표를 보면, 한국 또는 미국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와 통화가 이뤄졌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는 발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양쪽 실무진이 정상 통화를 준비하면서 “이번엔 미국(또는 한국)에서 전화를 건 것으로 발표하기로 하자”고 합의하면, 이 합의에 따라 발표 내용을 조정한다.
외교안보 상황실에서 국정 상황실로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상황실장을 지낸 마이클 본은 저서 (Nerve Center- Inside the White House Situation Center)에서 “정상 간 통화에서 보통은 미국 대통령이 먼저 말을 꺼내고, 그렇게 하려면 의전상 그가 나중에 전화 회선에 나와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엔 대개 클린턴 대통령이 나중에 전화 회선상에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엔 달라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의전비서관과 대변인을 지낸 천호선씨는 “실무진 간 협의를 거쳐,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동시에 수화기를 들었다. 직선적 성격의 부시 대통령은 수화기를 들자마자 먼저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과거엔 ‘국가 위기’(National Crisis)란 전쟁을 비롯한 안보상 위험을 뜻했다. 2001년 9·11 테러는 국가 위기의 개념을 바꿔버렸다. 대규모 정전을 막고, 원전 시설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게 국경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중요해졌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는 자연재해도 엄청난 국가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카트리나 이후 결정적으로 레임덕에 빠졌다. 백악관이 2006~2007년 상황실을 전면 리노베이션한 데엔, 이런 상황 변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깔려 있었다. 리노베이션 이후, 백악관 상황실의 기능은 달라졌다. 조 해긴 백악관 부실장은 〈ABC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예전 상황실이 백악관 NSC 중심의 체제였다면, 새 상황실은 NSC뿐 아니라 국토안보부와 백악관 다른 부서의 활동을 위한 통신 허브로서 기능하도록 꾸며졌다.” 외교안보 상황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국정 상황실로 기능을 넓힌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지하벙커 상황실이 관리한 국가 위기는 유형별로 33개에 달했다. 북핵 우발 사태를 비롯한 안보 분야 13개, 지진 등 재난 분야 11개, 대규모 정전 등 국가 핵심기반 분야 9개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상황실 기능은 크게 축소됐다. 자칫 잘못했으면 상황실 벙커는 아예 사라질 수도 있었다.
올해 초, 대통령직 인수위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마련하면서 ‘작은 청와대’에 제1의 목표를 뒀다. 노무현 정부에서 확대 개편된 NSC 사무처가 통째로 폐지됐다. 상황실은 NSC 사무처 산하에 있었다. 정부조직 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한 건 2월22일, 사흘 뒤 정권이 바뀌면 상황실은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NSC에 근무했던 인사는 “상황실 불을 끄긴 쉽지만 다시 켜는 건 쉽지 않다. 상황실엔 22개 기관의 각종 정보가 들어오는데, 각 기관의 정보 운영체계가 달라 이걸 하나로 통합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불을 꺼버리면 프로그램이 망가져버린다. 다시 프로그램을 작동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NSC 인사들은 새 정부의 첫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에 내정된 김병국씨 쪽에 “상황실 문제를 다시 생각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 뒤…상황실이 문을 닫지 않은 데엔 김병국 외교안보수석(현 고려대 교수)의 역할이 컸다. 그는 새 정권이 출범한 2월25일 아침 가장 먼저 상황실을 둘러보곤 없애선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다. 곧바로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상황실 문제를 보고했고, 다른 수석비서관들과 협의를 거쳐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건의했다. 김병국 교수는 “이 대통령이 직접 상황실에 내려와보고는 계속 존치시키기로 결정했다. 6개월이 지난 뒤 운영 결과를 보고 확대 여부를 판단키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아예 상황실을 없앨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부조직 개편법을 만든 사람들이 NSC 사무처 아래 상황실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규모와 기능은 현저히 축소됐다. 상황팀장 직급이 1급 비서관에서 2급 행정관으로 내려갔고, 상황실 총인원도 23명에서 15명으로 줄었다. 재난상황 관리업무는 중앙재해대책본부로 넘겨졌다.
이명박 정부가 상황실의 필요성을 재인식하는 데엔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올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 발생하자, 청와대 위기관리 보고체계의 취약함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대통령은 “보고에 무려 2시간 이상 걸린 건 중대한 문제다. 위기관리 시스템을 개선하라”고 질책했다. 한때 폐쇄될 뻔했던 위기정보상황팀(상황실팀)은 국가위기상황센터로 확대됐고, 상황팀장 직급도 1급으로 다시 올라갔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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