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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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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제1정보원, 언론


CIA의 백악관 일일브리핑·국정원의 청와대 일일현안보고,
엄선된 정보의 상징성은 높지만 ‘가치는 별로 높지 않아’
등록 2009-01-23 05:00 수정 2020-05-02 19:25

2004년 4월10일 백악관에선 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대통령이 매일 아침 받아보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정보보고서 내용이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대통령 일일브리핑’(President Daily Briefing·약칭 PDB)이라 불리는 이 문건은 ‘전세계 특급정보의 보고’로 알려졌지만 그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날 공개된 건 9·11 테러 한 달 전인 2001년 8월6일치 PDB 가운데 오사마 빈 라덴의 미국 본토 테러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 한 장이었다. PDB의 극히 일부분이고 일부 대목은 보안상 이유로 검은 줄이 쳐져 있었지만, 극비 정보의 산실로 알려진 ‘대통령 일일브리핑’ 내용이 공개됐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가 됐다. 백악관과 CIA는 PDB가 대통령의 통치 영역에 해당하는 사안이므로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의회와 9·11진상조사위원회의 공개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PDB 공개는 미 CIA가 어떤 형식으로 PDB를 작성하는지, 문체는 어떤지, 어떤 팩트(사실)와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신문 1면을 만드는 것과 비슷

대통령의 눈을 잡아끌려는 정보기관·부처의 경쟁은 뜨겁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의 눈을 잡아끌려는 정보기관·부처의 경쟁은 뜨겁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푸른 색 표지의 PDB는 보통 10~12쪽 분량으로, 각 쪽마다 1개의 주요 정보사항이 담긴다. CIA 분석관들은 전세계 CIA 지부와 미 대사관, 다른 정보·수사기관으로부터 밤새 받은 정보 가운데 대통령이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추려내 보고서에 담는다. 제임스 울시 전 CIA 국장은 수많은 정보 가운데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보만 골라내는 일이 “꼭 신문 1면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테러리스트들의 유력한 테러 첩보라든가, 전세계 주요 지도자들의 건강상태 같은 것들이 ‘핫 뉴스’로 취급된다. 북한 핵 문제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향도 가끔 PDB에 올랐다.

PDB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오전 8시께,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 오벌오피스에 배달된다. 대통령이 휴가를 가면 휴양지로, 해외 순방을 하면 순방 도시의 숙소로 배달된다. 하루도 빠지는 적이 없다. 백악관으로 전달될 때엔 대개 CIA 국장과 구두 브리핑을 하는 정보국 고위관리가 보고서를 직접 들고 들어온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 자리에 딕 체니 부통령과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 앤드류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도 불렀다고 한다. 측근들과 함께 모여 브리핑을 받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보고서 사본은 백악관 아침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에게도 별도로 전달된다. 보고서 사본을 국방장관과 국무장관이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CIA 관리가 곧바로 회수해간다. 외부 유출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처다. 이런 식으로 PDB는 수십 년간 정권 핵심인사들에게만 공개된 채 단 한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백악관에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는 PDB가 유일하지 않다. 부정기적이긴 하지만, 미 국방부의 국방정보국(DIA), 국무부의 정보조사국(INR), 연방수사국(FBI), 국가안보국(NSA) 등 다른 정보·수사기관들도 경쟁적으로 백악관에 보고서를 올린다. CIA가 이들 기관 보고서와 PDB를 차별화하는 방식은 정보원(source)을 특정하는 데 있다. 제임스 울시 전 CIA 국장은 “PDB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소스를 적시한다”고 말했다. 가령 어느 나라 대통령의 건강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정보를 올릴 때엔 그 정보가 대통령궁 의료진의 입에서 나왔다는 식의 구체적 설명이 덧붙여진다. 그렇게 해서 정보의 신뢰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렇게 엄선된 정보는 그 상징성만큼이나 정확하고 가치가 있을까? ‘밖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난 정보들이 담기진 않는다’는 게 백악관 전직 고위관리와 PDB를 훑어봤던 의회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오히려 실망스런 수준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보능력평가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찰스 롭은 인터뷰에서 “내 기억으론 전·현직 관리 중 PDB가 가치 있었다고 말한 사람이 없다”고 밝혔다. 2003년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대량살상무기 보유였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어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롭이 위원장을 맡았던 위원회는 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가 부정확했는지를 가리기 위해 2년간의 PDB를 검토했다. 이 위원회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PDB에 수록된 정보는) 재앙적일 정도로 한편으로 치우쳐 있었다”고 비판했다. 찰스 롭은 “고위관리들은 그 보고서가 대통령의 일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하려고 PDB를 읽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어처구니 없는 정보가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는 건, 대통령 눈길을 끌어서 신임을 얻으려는 정보기관의 속성 탓이 크다. 는 “서로 자신의 정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는 정보기관들의 경쟁과 분열 때문에 PDB가 왜곡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CIA가 PDB 정보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장치를 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정보가 사실인지를 확인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니 단편적으로 흩어진 여러 정보들 가운데 서로 상충되는 게 있더라도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을 앞에 내세우려는 욕구가 본능적으로 일어난다. 마치 신문이나 방송이 뉴스 보도를 하면서 독자 관심을 잡아끌기 위해 센세이셔널하게 내용을 편집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는 PDB를 받아봤던 전직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해 “대통령은 다른 보고서들을 함께 읽으면서 PDB 정보들을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PDB에 실린 정보만 갖고 모든 걸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다른 여러 정보들과 함께 종합적인 큰 그림을 그려야 비로소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에 올라오는 정보보고서엔 얼마나 정확하고 가치 있는 정보들이 담겨 있을까?

“이걸 봐주세요” 다투는 정보기관들

청와대로 매일 올라오는 보고서는 대략 세 종류다. 국정원 보고서와 경찰청 보고서, 그리고 외교안보 사안을 담은 외교부 보고서다. 국정원과 경찰청 보고서는 일일 상황보고 형식이고, 외교부 보고서는 정책사안별 보고 형식을 띤다. 이중 단연 관심을 끄는 건 역시 국정원 보고서다. 매일 아침 올라오는 국정원 ‘일일현안보고’는 미국 PDB처럼 한 쪽에 1개 사안씩 정리돼, 보통 1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10개 정도씩 그날의 주요 현안에 대한 국정원 정보와 분석이 담기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받아봤던 전직 청와대 고위인사는 “일일보고서는 대통령뿐 아니라 관련 수석비서관과 해당 부처 장관에게도 전달이 된다. 전체 분량이 다 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중 관련 있는 부분만 떼어서 보내진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국정원 일일현안보고는 아침마다 대통령 관저로 배달됐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사는 “당시엔 비서실장과 대변인이 아침마다 관저로 보고를 올라갔는데, 국정원 보고서가 기본적인 텍스트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의 일일현안보고를 직접 보기도 했지만, 대개 국정상황실을 통해 해당 수석들이나 비서관들에게 내려보냈다.

국정원장 독대, MB 정부서 부활
2004년 4월10일 백악관이 공개한 ‘대통령 일일브리핑’(PDB). PDB가 공개된 건 사상 처음이었다.

2004년 4월10일 백악관이 공개한 ‘대통령 일일브리핑’(PDB). PDB가 공개된 건 사상 처음이었다.

일일현안보고 외에, 대통령 지시사항이나 주요 현안에 대한 특별보고서가 부정기적으로 대통령에게 올라오기도 한다. 컴퓨터로 볼 수 있도록 CD 형태인 경우도 있다. 이런 보고서엔 첫장에 배포 범위가 적혀 있다. 한 인사는 “가령 대통령을 포함해 비서실장, 수석비서관, 장관 등 5명에게만 보고서를 보낸다면, 대통령에게 가는 보고서엔 5-1, 비서실장 보고서엔 5-2, 이런 식으로 일련번호가 적혀 있다. 나중에 회수할 때 어떤 보고서가 사라졌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대통령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또다른 통로는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국정원장 보고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는 정보기관의 막강한 힘을 유지하는 끈이었다. 도청과 망원(網員)을 통해 얻은 비밀스런 정치 정보들이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이게 국정원의 권력을 유지시켰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는 사라졌다. 김 대통령은 국정원장과 만날 때 비서실장을 배석시켰다. 노무현 대통령 들어선 비서실장 외에 민정수석도 배석했다. 제3자가 배석하면 국정원 보고 내용은 훨씬 정제되고 걸러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국정원장 독대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부활했다. 김성호 국정원장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1~2시간 정도씩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접 단독보고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기관은 항상 특급 정보로 대통령 눈을 사로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이게 어려워지는 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신문·방송·인터넷과 경쟁하는 건 전세계 정보기관에겐 버거운 일이 됐다. 우리 국정원 보고서에 대한 전임 정부 핵심인사들의 평가는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밖에 알려진 것만큼 효용성이나 가치가 높지 않다”는 것이다. 국정원 일일현안보고를 받아왔던 전직 청와대 비서관은 “전체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업무에 관한 내용들에선 새로운 게 별로 없었다. 오히려 경찰 정보나 부처에서 올라오는 보고서가 개별 현안들을 파악하는 데는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 비서관은 “대통령이 염두에 두는 ‘오늘의 현안’이 이런 것들이겠구나 하는 판단을 하는 데는 도움을 줬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요직은 두루 거친 한 인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국정원 보고서가 확 눈길을 끌려면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 첫째, 중요한 사안이어야 하고 둘째, 새로운 내용이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안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아이템을 국정원이 먼저 보고하는 일은 사실 매우 드물었다.” 김대중 정부의 핵심 인사도 “대통령에게만 직접 가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내용이 별로 없었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중앙일간지와 9시 뉴스로 현안 점검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백악관 지하상황실의 텔레비전은 항상 〈CNN〉에 고정돼 있다. 중요 사건이 터지면 〈CNN〉만큼 현장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정보원이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가장 가치 있는 정보와 상황 판단의 자료를 얻는 통로 역시 언론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아침 관저보고를 올라가는 비서실장과 대변인의 손엔 항상 언론 보도 분석자료가 들려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매일 아침 비서실장 주재로 일일현안 점검회의를 했는데 기초 텍스트는 국정원이나 경찰청 보고서가 아닌, 중앙일간지와 3개 방송의 9시 뉴스를 정리한 언론 보고서였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인사는 “냉전 종식 이후 가장 많은 정보는 언론에서 나온다. 언론만큼 방대하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은 없다. 정보기관은 언론에 노출된 정보를 분석하고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데 아직 이런 데 익숙하지 못하다. 대통령이 아침에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데 언론보도만큼 좋은 게 없고, 이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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