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20일, 백악관에 입성한 조지 부시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휑하니 비어 있는 사무실 벽엔 부시를 조롱하는 낙서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전화선과 컴퓨터 랜선은 예리하게 끊겼고, 복사기에 저장된 음성 녹음은 음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부시 쪽을 더욱 화나게 한 건, 수많은 컴퓨터 자판에서 ‘W’ 키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이름(George W. Bush)을 제대로 치는 걸 방해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음란한 낙서와 사라진 ‘W’ 키
부시 참모들은 백악관 물품이 훼손된 사례를 수집했고, 이 사실은 공화당 인사들을 통해 언론에 흘러나왔다. 수집된 사례 중엔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샴페인 잔이 없어지고, 대변인용 방탄조끼를 누군가 훔쳐간 일도 있었다. 치기 어린 장난처럼 보였던 사건은 막상 언론에 공개되면서 눈덩이처럼 커졌다. 보수 성향 인터넷 매체들은 “훼손된 물건을 복구하려면 국민 세금을 써야 한다. 빌 클린턴 백악관 사람들의 행동은 범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부시 참모들이 정식 수사를 의뢰할 것이란 보도까지 나왔다.
빌 클린턴 전임 대통령 쪽 인사들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 클린턴 쪽은 “에어포스원에서 없어진 샴페인 잔은 누가 훔쳐간 게 아니라 실수로 깨진 것”이라고 밝혔다. 몇몇 군데에 낙서를 한 점을 인정하면서 “그건 유치한 장난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대선에서 부시와 맞붙었던 앨 고어 부통령의 부인은 딕 체니 새 부통령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백악관에서 발생한 여러 불미스런 일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쪽도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애리 플라이셔 새 백악관 대변인은 피해 액수에 대한 언급을 피하면서, 이번 일이 법적인 문제로 비화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정권 이양기’란 힘들고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기란 점을 부시 대통령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부시의 말대로, 떠나는 사람에게나 오는 사람에게나 정권 이양(Presidential Transition)처럼 어려운 시기는 별로 없다. 같은 정당 후보에게 정권을 인계할 때엔 그나마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지만, 정권이 다른 정당으로 넘어가면 전·현 정권 간의 감정적 앙금과 갈등은 왕왕 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순조로운 정권 이양을 결정하는 데엔, 현직 대통령과 새 대통령 당선자의 인간적 관계가 큰 영향을 끼친다. 대선이 끝난 직후 이뤄지는 현직 대통령과 새 대통령 당선자의 회동에 언론이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권 이양이 매끄러울지를 현직과 미래 대통령의 만남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 미국 대선이 끝난 뒤 정권 이양을 위해 백악관에서 만난 지미 카터 대통령(민주)과 로널드 레이건 당선자(공화)의 회동은 그리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선거운동 때부터 카터는 레이건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대변인을 지낸 조디 포웰은 “카터는 레이건이 현안에서 벗어난 질문을 자꾸 던지는 데 당황했다”고 당시 회동 분위기를 전했다. 그 무렵 최대 현안은 미국인 63명이 이란의 혁명정부에 의해 테헤란 미국대사관에 장기간 구금돼 있는 사건이었다. 카터는 테헤란 인질사건 정보를 레이건과 공유하려 했지만, “레이건은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카터 행정부)가 모든 책임을 져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고 포웰은 말했다. 전임 정권이 풀지 못한 숙제를 굳이 물려받지 않으려는 정치적 판단일 수 있지만, 어쨌든 이 일로 카터와 레이건의 정권 이양은 첫 출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노무현과 MB, 분위기는 좋았으나…빌 클린턴 대통령(민주)과 조지 부시 당선자(공화)의 만남도 매끄럽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선거에서 직접 맞붙은 건 아니었지만,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까지 거친 유례없는 격전을 치른 탓에 양쪽의 분위기는 격앙돼 있었다. 2001년 1월20일 취임식 직전,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부시 새 대통령을 불러 차를 한잔하자고 하고선, 10분이나 뒤늦게 나타나 부시를 기다리게 했다. 더구나 클린턴은 그 자리에 부시와 싸웠던 앨 고어 부통령까지 초대했다. 부시 백악관의 대변인을 지낸 애리 플라이셔는 “그 방의 분위기가 어땠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12월 대선 뒤 청와대에서 첫 만남을 가진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자의 관계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두 사람은 대선에서 직접 맞붙진 않았지만, 선거운동 기간 내내 충돌했다. 대선이 끝난 뒤 노 대통령과 이 당선자는 두 차례 만났다. 첫 번째는 단독 회동이었고, 두 번째는 부부 동반 만찬이었다. 회동 분위기는 대체로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쪽의 한 인사는 “대선 때의 앙금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이 당선자는 깍듯했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도 선임자로서 국정 운영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갈등의 씨앗은 그 자리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이 당선자는 미리 단단히 준비를 해온 듯,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을 노무현 정부가 책임지고 끝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골치 아픈 문제를 후임 정부에 넘기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선 직접 언급을 피했다. 그 대신 “한-미 정상회담 이전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2008년 4월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 난 뒤 이런 대화 내용이 쟁점으로 떠올랐고, 두 사람 간 갈등을 증폭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됐다. 이 대통령 쪽은 “노 대통령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노 대통령 쪽 인사는 “이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겠다고 약속해놓고서 정권이 바뀐 뒤엔 뒤통수를 치듯이 하니까, 노 대통령은 (퇴임 이후) 더 심한 인간적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반대로, 현직 청와대의 핵심 인사는 “새 정부의 첫 조각 직후, 도저히 언론에선 알 수 없는 (장관·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 관한) 내용들이 보도됐다.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과거의 인사 자료를 언론에 흘렸다는 심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권 이양 기간의 양쪽 불신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이양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사례로는, 1997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의 인수인계를 꼽을 수 있다. 50년 만에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갔지만, 김영삼(YS) 대통령과 김대중(DJ) 당선자의 인간적 관계는 당시엔 매우 좋았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불화를 빚은 YS는 내심 이 후보보다는 DJ의 당선을 바랐다. 그는 대선 직후 사석에서 “DJ가 이겨서 잘됐다”고 말했다고 한 민주계 인사는 전했다. DJ 역시 YS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대선 직전 DJ의 비자금 문제가 터졌을 때 검찰 수사를 막아준 건 YS였다. 외환위기 탓이 컸지만, 정권 인수인계 기간에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가 매주 주례회동을 가진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 대통령 부인 손명순씨는 김대중 당선자 부인 이희호씨를 따로 청와대로 초청해, 대통령 관저 안 침실까지 일일이 둘러보게 했다.
지지율 낮은 대통령이 정권을 넘겨줄 때김영삼 대통령 수행실장을 지낸 김기수씨는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김영삼 당선자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YS와 DJ는 매주 만났다. YS는 DJ에게 굉장히 잘해줬고, DJ도 YS에게 아주 잘했다. DJ는 ‘앞으로도 잘 지냅시다’라며 김현철씨 문제를 포함해 모든 걸 다 해결해줄 것처럼 얘기했는데, 이게 결국 둘 사이의 관계에 금이 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뀐 뒤 YS의 차남 현철씨 사면 문제로 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지지만, 적어도 정권 이양기 동안엔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퇴임 닷새 전인 1998년 2월20일 기자간담회에서 YS는 “검찰이 (DJ 비자금) 수사 유보를 결정한 건 아주 잘한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조지 부시 대통령의 관계는 YS-DJ의 관계와 흡사하다. 대선 전까지 오바마와 부시는 서로를 인색하게 평가했다. 오바마는 2004년 다른 초선 상원의원들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해 부시를 만났을 때를 회고하며 “권력이 가져다주는 위험한 독선을 느꼈다”고 말했고, 부시는 “오바마보다는 힐러리 클린턴이 훨씬 대통령 될 준비가 잘돼 있다”고 주변에 얘기했다. 그러나 대선 직후인 11월10일, 부시 대통령과 오바마 당선자의 첫 백악관 회동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짙은 감청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파란색 넥타이를 똑같이 차려입었다. 경제 실패로 인기가 바닥인 현직 대통령과 희망과 기대를 한껏 받고 있는 차기 대통령, 이런 경우엔 비록 정당이 달라도 정권 이양은 예상보다 순조로울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자에게 의지해 임기 말과 퇴임 이후의 평가를 높이려 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은 인터뷰에서 “(지지율이 바닥인) 부시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평가라도 남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같은 정당끼리 정권을 인수인계하면 갈등은 훨씬 줄어든다. 전임 정권과 후임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서로 겹치거나 친분이 두텁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걸 ‘우호적인 정권 이양’(Friendly Transition)이라 부른다. 미국에서 ‘우호적인 정권 이양’은 1930년 이후엔,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공화)이 조지 부시 부통령에게 백악관을 넘겨준 게 유일하다. ‘우호적인 정권 이양’이 반드시 순조로운 건 아니다. 앤드루 카드 전 백악관 비서실장은 “(같은 정당에서 정권을 주고받으면) 백악관 직원들이 모두 자신의 유임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인사를 하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다. 이 문제가 간단치 않은 건 자칫 전·현직 정권의 미묘한 갈등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청와대에서 노무현 청와대로 넘어갈 때가 그랬다.
청와대 대폭 물갈이에 충격받다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자 청와대는 ‘정권 재창출’에 환호했다. 정권이 바뀌지 않으니 청와대 직원의 상당수는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현실은 냉정했다. 40여 명의 청와대 비서관 가운데 노무현 정부에서도 살아남은 이는 딱 두 사람, 권재철 노동비서관과 김형욱 시민사회비서관뿐이었다. 3급 이하 행정관 중에서 그대로 청와대에 남은 이들 역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당시 정권 이양 과정을 지켜본 한 인사는 “인사에 관한 한, 노무현 정부는 청와대를 거의 완벽하게 물갈이했다. 이건 김대중 정부 사람들에겐 충격이었다. 상당수 인사들이 새 자리도 잡지 못한 채 청와대를 나가야 했다. 두 정권의 냉랭한 관계는 그때부터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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