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지원 불꽃 되살리는 이윤구 한적 총재… “수십대 트럭에 의약품 싣고 평양적십자병원 지원”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그간 한적은 남북관계나 국제 구호활동에서 앞서 이끌기보다는 끌려다닌 측면이 있다. 이제는 한적이 이런 활동에서 앞서가는 조직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지난해 12월29일 대한적십자사(한적)의 총재로 취임한 이윤구(74) 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는 입을 열기가 무섭게 한적의 변화와 혁신 등을 강조했다. “오직 봉사만이 삶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한적을 꺼져가는 대북 지원의 불꽃을 되살리고 남북 화해를 중재하며 꽃피우는 전령으로서의 사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했다. 새 총재를 맞이한 지 3개월째를 맞이하는 한적은 기존의 노쇠하고 수동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재도약을 위해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총재 취임 즉시 북 적십자사 초청받아
이제 정부의 그늘이나 보호막에서도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게 이 총재의 소신이다. 단순히 정부가 위임하는 일만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한적은 국제구호 사업과 대북지원 활동 등에서 정부와 민간기구의 중간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 또 정부나 민간이 나서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로 내놓고 하기 힘든 일들이 있다고 본다. 민간단체의 역량을 중간에서 결집하는 일도 중요하다.” 국제적십자사 연맹 가입국 181개 나라 가운데 9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내는 한적의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이 총재의 생각이다.
이 총재는 국제난민 구호와 대북지원 사업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전문가이자 실천가이다. 1973년부터 9년간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주재 대표를 지낸 것을 비롯해 1985년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 20여년을 중동과 아프리카의 빈민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대북지원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90년부터 북녘 동포 등을 돕기 위해 기독교계와 함께 대대적으로 펼친 ‘사랑의 쌀’ 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았으며, 1995년에는 한국선명회 회장과 범종단 북한수재민돕기운동 추진위원장으로 의약품과 황소 등 각종 물자를 북한에 보내는 데 앞장서 대북지원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 뒤 1996년에 국내의 대표적인 대북지원 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를 했고, 한적 총재에 선출되기 직전까지 북녘 땅 구석구석을 누비며 따뜻한 동포애를 전달해왔다.
이 총재는 이제 북녘 사람들의 눈빛만 봐도 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원하는지 알아맞힌다고 한다. “방북할 때 30번까지는 횟수를 외웠는데, 그 다음부터는 세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북쪽 사람들이 나를 무한히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고, 이것이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적십자중앙위원회(위원장 장재언)는 이 총재가 취임하자마자 평양에 와달라며 방북 초청 의사를 보내왔다. 북쪽에서 직접 한적 총재에게 북한을 방문하도록 초청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총재는 대북 지원 물자 가운데 특히 의약품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열악한 의료 실태를 직접 목격한 그는 우선 평양 적십자사 병원을 재건하고, 각종 의약품과 설비를 지원하는 데 힘을 쏟을 작정이다. 이 첫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다른 지역에도 잇달아 병원을 짓고, 의료 실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계획을 갖고 있다. 북한은 이 총재에게 적잖은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북한은 지난 2월 말 기본의약품인 소독약을 비롯해 항생제·마취제·지혈제·항암제·비타민제 등 50개 종류의 ‘약품 소요 명세’를 한적에 보내왔다. 이 총재는 서둘러 국내 제약업체들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고, 이들은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불구하고 잇달아 기증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인터뷰를 하던 3월17일에도 병원의약품 전문 판매회사인 (주)동부팜넷을 비롯한 7개 제약업체가 모두 5억9300만원 상당의 의약품을 기탁했다. 동부팜넷은 1억6550만원 상당의 항생제 주사 5만개를 기증했으며, 삼진제약은 항생제 등 2억1천만원, 녹십자는 1억2천만원, 아산재단은 5천만원, 동신제약은 3500만원, 진양제약은 진통제 등 1천만원, 삼천당제약은 소염제 등 300만원 상당의 의약품을 각각 기증했다. 이 총재는 인터뷰 도중에도 속속 기증 의사를 밝혀오는 제약업체들의 전화를 받고는 흐뭇함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이 총재는 그간 북한 의료지원 사업을 남쪽이 아닌 국제적십자사 연맹에 거의 맡겨온 데 대해 적잖게 부끄러워했다. 연맹은 몇년 전부터 자강도, 평안남북도, 개성시 등 5개 지방의 보건원에 필요한 약을 지원하는 등 의료사업을 펼쳐왔다. 올해는 1400만달러 규모의 목표를 세워놓고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는 “(북한을 지원하는 게) 남의 나라 일도 아닌데, (한적이) 연맹을 통해서 지원을 한다는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평양적십자병원 지원사업이다. 이 총재는 남쪽의 의사와 간호사, 제약업자 등을 데리고 평양을 방문해 남북 의료인 사이의 직접적인 협력을 성사시킬 계획이다. 북한도 이 총재의 뜻에 흔쾌히 받아들여 방북 일자와 경로를 최종 조율 중이다.
“남쪽 의료인들이 직접 병원 등을 방문해 의료 설비 상태나 환자들을 살펴보고 뭐가 부족하고 문제인지 파악해야 북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북쪽에 설명했다. 다행히 북쪽도 이해했고, 남쪽에서도 호응이 좋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총재는 가급적 4월 중에 북한을 다녀오기로 하고, 조만간 남북한 당국과 협의를 거칠 생각이다.
그가 구상하는 방북 경로도 눈길을 끈다. 그는 20여명의 남쪽 의료 대표단과 함께 의약품을 수십대의 트럭에 싣고 경의선 육로를 거쳐 평양적십자병원에 갈 예정이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1001마리를 트럭에 싣고 휴전선을 넘는 장엄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북쪽과의 돈독한 신의를 감안하면 이 총재의 구상은 그리 어렵지 않게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적이 이번에 처음으로 의약품을 육로로 운반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북한에 지원하는 의약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링거가 10톤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5톤 트럭 두대가 필요한 분량이다. 배로 보내면 파손의 위험이 클 뿐 아니라 운송 비용도 만만찮다. 따라서 육로 운반이 불가피한 셈이다.
이 총재는 ‘한적은 북한이 원하고 필요한 일이라면 어떤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물론 적십자 정신에 부합하고, 더불어 민족화합과 발전에 이바지하는 일이라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은 평양에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는 데도 적잖은 관심을 표시했다. 이 총재는 이번 방북 때 한적이 중간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머슴 역할을 하겠다는 자세다. “지레 이런 일은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꿈속에서 사는 어린애 같다’고 말한다. 꿈꾸는 백성들이 있는 나라는 흥하지만, 꿈을 잃어버리는 순간 나라는 망한다. 한적이 모두에게, 특히 북녘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북한 설득, 이산가족 상봉 방식도 바꿀 것"
북녘에 친척을 둔 실향민이기도 한 이 총재는 북한을 설득해 그간의 이산가족 상봉 방식도 바꾸려 한다. 이제 금강산 한곳에서만 한번 만나고 헤어져 다시 보기 힘든 상봉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북쪽 사람들이 꼭 한번 구경하고 싶어하는 제주도 등에서의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도 적극 추진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산가족 상봉 인원을 늘리고, 상시적으로 만나며, 편지도 교환하고, 이산가족뿐 아니라 실향민들도 북녘 고향땅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그는 한적이 남북한 지방자치단체 사이의 교류를 지원하는 역할도 할 작정이다. “최근 부산, 마산, 포항 등 지방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왔다. 다들 북한의 지방자치단체들과 교류하면서 도와주고 싶어하더라. 심지어 군 단위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이번 방북길에 남북한 지자체 사이에 서로 오가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유무상통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이어주는 역할을 하겠다.” 이제 한적은 남북 교류의 징검다리로 새 역사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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