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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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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다음엔 인권?

등록 2004-02-26 00:00 수정 2020-05-03 04:23

생체실험 폭로 등으로 점점 뜨거워지는 북한 인권 문제, 한국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핵 다음에는 ‘인권’이다.”

한국 정부의 시름이 남몰래 깊어지고 있다. 북한 인권 논란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마냥 모른 체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외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북한에서 정치범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입증하는 문건이라며 탈북자인권단체가 공개하는가 하면, 영국의 <bbc>는 이를 뒷받침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내 국제사회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북한의 생체실험을 폭로하는 ‘악에 접근하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bbc>는 “가스실에서 일가족이 살해되고, 생체실험 대상이 된 50명의 부녀자들이 한꺼번에 죽었다”고 보도했다. 덩달아 영국 정부도 인권 문제를 대북정책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국제인권기구들도 격앙돼 있다. 국제 앰네스티,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 등은 수용소에 구금된 정치범이 최고 20만명에 이르며 고문·강제 낙태·영아 살해 등 인권 유린이 극심하다고 주장한다.

탈북자 단체 ‘활약상’ 두드려져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도 높다. 특히 인권 피해의 당사자이기도 한 탈북자들이 중심이 된 관련 단체들이 ‘북한 인민 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탈북자동지회, 백두한라회, 북한민주화운동본부, 평화통일탈북인연합회, 통일을 준비하는 귀순자 협회 등과 이들 5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만든 탈북자단체연합회 등이 단연 눈길을 끈다. 여기에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피랍탈북인권시민연대 등 북한인권 비정부기구(NGO)가 가세해 여론을 형성하고, 남북한 당국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지난해 11월 캐나다 이민난민심사위원회(IRB)로부터 망명 요청을 거부당한 리성대씨의 승인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주한 캐나다 대사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백두한라회는 중국 내 탈북자의 대규모 입국 추진을 공개적인 사업목표로 삼고 있다. 과거 선언적 차원에 머물렀던 이들의 활동은 이제 구체적인 실천의 장에서 북한 인권문제 해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더구나 ‘탈권위’를 지향하는 정권이 들어선 뒤 탈북자들의 자율적 활동공간도 크게 넓어지면서 이들의 활동은 거침없어 보인다.

이들 탈북인권단체들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 커질 게 확실시된다. 지난해 연말 미국 연방 상·하원에 상정되어 통과를 기다리는 ‘2003 북한자유법안’(North Korean Freedom Act of 2003)은 북한의 인권 향상과 탈북자의 보호를 위해 힘쓰는 국내외 단체나 개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법안은 구체적으로 한국·미국·일본 내 비정부기구에 2003년 회계연도부터 2006년 회계연도까지 해마다 200만달러를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힘을 합쳐 북한의 인권 문제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론화할 경우 대북정책에서 북한인권 문제는 핵 못지않은 주요 변수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여론을 환기시키고, 특히 북한 정권을 끊임없이 효과적으로 압박하는데는 치부를 계속 드러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고 말한다. 탈북자들이 내놓는 증언들은 신뢰성 여부를 떠나 ‘북한의 악마화’를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는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욱 충격적인 실상들이 속속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경험을 한 탈북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지난 2001년 583명의 탈북자들이 입국했고, 2002년에는 1140명으로 곱절이나 늘었다. 2003년에는 1200여명이 들어와 국내의 탈북자 입국자 수가 3천명을 넘어섰다. 중국에 떠도는 수만명의 탈북자까지 감안하면 새로운 폭로거리는 널려 있는 셈이다. 더구나 국제기구나 미국 내 인권기관들이 부지런히 이들과 접촉하여 새로운 증언들을 받아내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여론 악화는 지원 축소로 이어져

2003년 4월에 열렸던 유엔인권위원회는 올해 회의에서 북한인권 상황을 똑같은 의제에서 우선적인 사안으로 계속 다루도록 결정하고,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에서 새롭게 발견된 내용과 권고사항을 보고하도록 요청했다. 2003 북한자유법안도 의회를 통과할 경우 미 국무장관과 대통령은 북한의 인권보호를 위해 정치범 수용소와 노동교화소 등에 관련된 공개 및 비밀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해야 한다. 아울러 반정부 인사들을 감금한 정치범 수용소와 17살 미만 어린이들을 수감한 것으로 알려진 수용소의 실태, 그리고 중국 내 탈북자 상황에 관한 총체적인 보고서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
마침 한국의 탈북민 지원단체인 ‘사단법인 좋은 벗들’(이하 좋은 벗들)도 2월23일 ‘북한 식량난과 인권 보고서’를 발표했다. 1997년부터 탈북자들에 대한 구호 활동을 펼쳐온 ‘좋은 벗들’이 현장에서 만난 2만5천여명의 탈북자 가운데 3005건의 인권침해 사례를 모아 꾸민 보고서에는 북한의 참담한 인권 실태가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좋은 벗들쪽은 “수천명이란 방대한 수의 표본조사를 통해 최대한 정치적 입장을 떠나 객관성을 유지하고, 추론이나 주장이 아닌 사실성에 기반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기존의 북한 공권력이 식량난이라는 비상통제 체제 아래에서 더욱 폭압적으로 변하면서 수많은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며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중국 국경을 넘어가거나, 생계를 위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 과중한 고문과 처벌이 일상화돼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그야말로 모두에게 ‘뜨거운 감자’다. 그냥 내버려둘 수도, 그렇다고 당장 이를 해결할 뾰족한 방법도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의 특수성 등을 내세워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며 지난해 유엔인권위원회의 북한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결의안 표결에도 불참한 바 있다. 북한의 인권 실상을 널리 알리는 일들은 인권 문제의 관심을 높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에 북한의 현 지도체제에 대한 혐오감이나 불신감도 증폭시키는 구실도 한다. 안타깝게도 국내외 여론의 악화는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식량 규모의 축소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북한의 식량난이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다. 세계식량기구(WFP)는 얼마 전 북한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져 WFP에 기증해주지 않으면 2, 3개월 안에 650만명이 배급을 못 받게 된다고 호소하였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지난 2002년 10월 미국에 의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 의혹이 불거지자 대북 지원을 중단하거나, 그 규모를 크게 줄인 바 있다. 북한 주민들은 굶주리게 하면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부시 행정부의 논리가 먹혀든 결과다.

조용하면서도 전향적인 정책을

옛 서독 정부도 한국과 비슷한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다. 당시 동독은 지금의 북한과 똑같이 서방 국가들이 인권 문제를 비난하는 것은 내정간섭으로 허용할 수 없다며, 인권개념을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사이에는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서독은 인권과 전반적인 관계 개선을 연계하는 전략은 소망스러운 목표이기는 하나, 동독 정부로 하여금 점진적인 인권 상황의 개선마저 포기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신중을 기했다. 대신 서독 정부는 내독관계성 차관을 실무책임자로 앉혀 동독의 정치범 석방과 이산가족 재상봉 사업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동독과 공식·비공식 협상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필요하면 대가도 지불했다. 서독은 동독 주민들의 인권 보장 노력이 동독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를 높일 뿐만 아니라, 특히 이동과 거주이전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 게 결코 체제 존립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설득해왔다. 한국 정부도 기존의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을 위한 ‘조용하면서도 전향적인’ 정책을 구사할 때가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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