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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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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92, ADIEU 386

등록 2008-04-18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총선 결과가 나왔다. 각 정당의 색깔을 당선 지역에 입힌 전국 지도로 총선 결과를 도해한 그림은 너무나 낯익다. 민주자유당 합당 이후 치러진 1992년 총선의 그것이다. 영남 지역과 수도권을 한편으로, 호남을 다른 한편으로 갈라진 것도 그러하지만 하필 한반도 한가운데의 충청도를 옛날 ‘자민련’에 이어 자유선진당이 석권한 그림까지 쏙 빼닮은 것이다. 그리고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한나라당이 함께 엮어낼 보수 대연정과 거대 여당의 모습도 그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영삼씨의 대통령 당선과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이 총선보다 나중이냐 전이냐 하는 것뿐. 하필 그렇게 해서 형성된 거대 여당이 꺼내들었던 구호까지 ‘세계화’니 ‘선진화’니 하는 것으로 거의 판박이다.

386에 대한 두 가지 해석

그렇다면 그사이 15년 넘게 진전됐던 파란만장한 ‘다이내믹 코리아’의 사회적·정치적 격동은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에 아무런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단 말인가? 단물 다 빠진 식상한 화두지만 여기에서 또 한 번 꺼내들지 않을 수 없는 명사가 ‘386’이다. 92년의 총선은 아직 이들 세대가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의 일로서, 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 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출현해 애를 먹고 있던 한국의 보수세력이 3당 합당이라는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이후 이념적 혼란과 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386은 곧 힘을 차리고 사회 곳곳으로 들어가 정계와 관계, 경제계와 문화계 등등에서 점차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와 맞물리면서 두 번이나 정권 창출의 주된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세대의 나이가 40줄로 들어선 뒤 처음으로 벌어진 2008년의 총선은 92년 총선의 ‘데자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첫 번째 가능한 해석은, 지난 15년간 이러쿵저러쿵했지만 결국 이들도 40대가 되면서 92년 이전에 존재하던 기성의 사회 구조에 완전히 동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래 386 세대는 80년대라는 강렬한 경험을 공유한 집단이기에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횡적으로 연대해 윗세대로부터 종적인 방향으로 내려오는 동화의 압력을 이겨내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야말로 스크럼 짜고 전투경찰 방패부대 밀어붙이던 가락을 살려 냉전시대 보수주의로 속속들이 찌든 대한민국의 기성 사회를 바꿔줄 것으로 기대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온 총선 결과를 보면 이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되레 스크럼을 풀고, 동료들의 어깨에 올렸던 양팔을 앞으로 힘차게 뻗어 92년 체제의 기성세대를 뜨겁게 포옹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미 숱하게 욕을 먹어 너덜너덜해진 집단이지만, 이번 총선을 통해 ‘세대로서의 386’은 확실하게 소멸됐다고 선언하는 것이 가능하겠다.

두 번째 해석이 있다. 선거 쟁점도 썰렁하겠다, 궂은비도 오시겠다 이들 대다수가 투표장 안 가고 방바닥에서 종일 뒹굴었을 가능성이다. 그 결과 92년 총선의 투표 행렬이 구성비 바뀜 없이 그대로 2008년에 재현됐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세대별 투표율을 구할 수 없어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투표장에 가보니 눈 씻고 찾아봐도 청장년을 볼 수 없더라는 많은 이들의 증언이 이 심증을 높여준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386 세대가 아직도 가슴에 ‘애국의 단심(丹心)’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어줄 근거는 되지 못한다. 지금이 ‘뜨거운 단심’을 품은 채 방바닥을 뒹굴 상황이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경부 대운하 공사가 시작되고 교육·의료 등 공공 서비스가 만신창이 되고 금융·기업 체제 모두 바뀌어, 한마디로 ‘하이 서울’에 이어 나라 전체가 ‘비즈니스 코리아’가 될 지경인데다 범보수 세력은 내각제 개헌을 가능케 할 200석에 육박할 전망이다. 이 상황을 낳은 46%라는 낯 뜨거운 투표율을 만드는 데 이들도 가담했다면 이 또한 ‘의식적 세대’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80년대는 잊어버리자

한 가지가 더 있다. ‘80년대식 운동권 패러다임’과 단절하려는 몸부림 속에서 민주노동당에서 뛰쳐나온 진보신당의 패배다. 창당을 선언한 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된 진보신당은 최악의 조직적·재정적 상황에서 분투했지만, 그들이 방바닥에서 뒹구는 사이에 심상정·노회찬 두 후보도 실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낙선했고 정당 투표율도 소수점 이하 두 자리의 부족으로 결국 비례 의석도 놓치고 말았다. 이제 386은 딱딱하게 화석화한 무표정의 기득권 집단으로 변한 것일까. 역설적이지만, 진보신당의 몸부림은 그래서 아주 옳은 선택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이제 80년대는 잊어버리자. 영화 에 의하면 데자뷔는 매트릭스 프로그램이 바뀌는 순간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벌어질 한국 정치사가 지난 15년의 되풀이가 되지 않으려면 응당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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