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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남쪽, 인도의 동쪽에 놓인 무더운 곳, 알록달록하고 맛있는 과일이 많이 나는 일련의 나라들은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여행지다. 그곳의 음식은 중국과 인도에 지리적으로 얼마나 가깝고 먼지에 따라 간장과 어장, 향신료와 코코넛 등 식재료의 쓰임새와 양이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에게 익숙한 것은 역시 동남아 최대 관광국인 타이 음식. 맵고 신 중국 요리 정도로 이해하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 화려하다. 일국의 음식을 먹는 것은 그 나라를 알아가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먹음으로써 이해하고 이해하려고 먹는다. 이방인이 느끼는 타이 요리의 진정한 매력은 맛보다도 형식, 특히 길거리 음식에 있다.
위생 문제를 떠나 타이의 많은 음식들은 남방계 국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본디 길거리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의 거리는 거대한 식당 그 자체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반경 100m 이내에서 반드시 뭔가 먹을 것을 팔고 있다. 차 한 대 지나가기도 빠듯한 골목을 요령껏 비집고 판을 벌인 노점상. 하필 버스 정류장 옆에 자리잡아 치지직, 뭔가 볶는 소리에 빵빵 자동차 소음이 섞여드는 노천 식당…. 뭔가를 먹기에는 너무 좁고 혼잡해 보이지만 파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그럭저럭 어떻게든 꾸려나가는 삶에 익숙하다. 담벼락에 바짝 붙어, 지나가는 자동차를 용케 피해, 나무 아래 좁은 그늘 안쪽으로 테이블이 펼쳐지고 의자가 놓인다. 가마솥만 한 웍에서 빠지직 기름이 튀고, 큼직한 나무 주걱을 이용해서 뭔가를 재빨리 들들 볶는다. 구리구리한 피시소스 냄새가 확 풍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팍붕파이댕(모닝글로리볶음)이 완성, 테이블로 척척 날라진다. 양은솥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자극적인 커리 향이 피어오른다. 탕탕탕탕, 나무 도마에 뭔가를 경쾌하게 다지는 소리….
뜨거운 태양이 위력을 잃어가는 늦은 오후, 타이 동북부 지방의 중소도시 콘깬에 와 있다. 별 특징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늘어선 블록을 몇 개 지나 행인들을 따라가자 어느 순간 휘황한 불빛에 휩싸인 공간이다. 제대로 찾아왔다. 야시장, 도시의 심장.
어둠이 내리고 소소한 욕망들은 거대한 식욕 뒤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수레를 앞세운 상인들이 어디선가 나타나고, 없던 테이블이 펼쳐지고, 축제처럼 사람들이 몰려와 그 틈을 채운다. 검푸른 하늘이 새빨간 석양빛과 뒤섞여 야시장은 이제 천상의 연회장처럼 호화로워졌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동남아시아 버전처럼. 관대한 어둠의 장막이 귀퉁이가 부서진 테이블과 플라스틱 의자를 가려 더 이상 누추하지 않다.
모두가 초대받은 파티다. 테이블에 앉아 다들 기분 좋게 웃고 있다. 하루 중 가장 넉넉한 시간, 사방팔방으로 음식들이 포진해 있다.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몇 발짝 걷지 않고 풀코스로 해결 가능하다. 바쁘지만 상냥한 사람들이다. 나를 향해 웃고, 오라고 손짓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능숙하게 해체해서 소스까지 찍어 내밀기도 한다. 입만 앙 벌리면 된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곳이 다시 있을까. 어린 시절 배고픔에 마음이 급해진 내 말을 선선히 들어주던 어머니처럼, 긴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음식부터 내주고 보던 그때 그 사람처럼, 이 소박하고도 풍요로운 땅은 고마움을 넘어서 미안할 만큼, 미안함을 지나서 결국 조금 슬퍼질 만큼 그렇게 너그럽다.
타이. 옛 이름은 시암. ‘Thai’는 자유, 라는 뜻이다.
박정석 소설가· 저자달콤 쌉싸름한 미소의 나라버마(미얀마)는 육지 위의 섬 같은 나라다. 자유롭게 입국은 가능하지만 허락 없이 아무 도시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명 관광지로 향하는 길은 원활하게 뚫려 있는 반면, ‘비밀의 수도’로 불리는 네피도는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출입문을 꽁꽁 닫고 있다. ‘출신 성분이 명확하지 않은 외국인 여행자는 수도에 들어가기 어렵다.’ 어디서 이런 글귀를 읽은 나는 버마에 가기 전부터 청개구리처럼 그 도시에 어떻게든 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도로 착각하는 양곤에 도착하자마자 그 꿈을 일찌감치 접었다. 출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잡지사 기자’라고 기록한 것이 화근이었다. “버마 정부는 미디어 관련 종사자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렇게 좋은 사진기를 들고 있으면 더더욱.”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이 겁을 주며 한마디 했다. 정치부 기자도 아니고 한낱 문화 관련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 뭐 그리 큰 경계 대상일까 싶었지만, 악을 쓰고 대들진 않았다. 길거리 환전소에서 이미 한 차례 봉변을 당한 터라 간이 콩알만 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비싼 가격에 환전을 해보고자 제일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길거리 ‘삐끼들’에게 환전을 시도했다. 버마는 화폐가치가 워낙 낮아 몇백달러만 환전해도 두툼한 돈다발을 몇 개씩 안겨준다. 그러다 보니 길거리에서 일일이 환전한 돈을 다 세어보기 어렵다. 한 다발의 돈을 꼼꼼히 헤아린 뒤 달러를 내주고 나머지 돈 뭉텅이를 한꺼번에 손에 쥐었는데, 이상하게 돈다발의 두께가 생각보다 얇았다. 그새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실랑이를 벌이길 몇 시간. 나는 끝내 달러를 돌려받았고, 환전 사기꾼들은 눈앞에서 먹잇감을 놓쳤다. 무서운 티도 내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며 호통치던 나는 그제야 독기를 빼고 한숨을 내쉬었다. 독실한 불교의 나라라서 사람들이 나쁜 짓을 거의 안 한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 사건을 계기로 생각해보면 사내 서너 명이 여자 한 명을 해코지하지 않고 말로 설득해서 환전을 성사시키려 했던 것 자체가 순진하다는 증거다.
비슷한 사건은 몇 번 더 있었다. 양곤 최고의 불교 사원인 슈웨다곤 파고다를 어슬렁거리는데 말쑥한 청년이 다가와 능숙한 영어로 파고다의 유래를 설명해주었다. 대학생이라고 소개한 그는 곧 승려가 될 예정이라고 했다.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는데 마지막에 그가 한 말은 “승복 살 돈을 기부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아뿔싸.
버마 사람들은 순수하고 맑을 거라는 믿음을 점점 잃어가던 차에 산악도시 칼로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트레킹 코스를 안내해주겠다고 따라나서는 그녀에게 일단 경계심이 발동했다. “제발 혼자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그녀가 수줍어하며 부탁의 말을 건넸다.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영어를 아주 잘하시는데 외국인과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며 시간이 되면 그 집에 함께 놀러가자고 했다. 생각보다 순진한 부탁에 끌려 칼로 산등성이에 사는 사람들의 집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산골짜기에도 한류의 바람은 거세게 불어왔는지 이준기와 이민호의 사진이 집집마다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우리보다 훨씬 부자처럼 보여. 그런데 우리는 가난해도 상관없어. 버마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거든.”
칼로 산등성이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미소의 나라’라는 버마의 별명이 어렴풋이 이해됐다.
황희연 여행 칼럼니스트
루앙프라방에서 더 들어가유네스코에서 정한 유적지 중 한 곳인 라오스 루앙프라방. 루앙프라방에서 메콩강 건너 깊숙이, 트랙터를 타고 다시 트럭을 잡아타고 찾아간 그곳. 라오스 소수민족인 몽족이 살고 있는 ‘반쪽’이라는 곳에 찾아갔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쪽마을’이라는 뜻이다.
2007년 루앙프라방 야시장에서 만난 현지 친구의 소개로 이른 아침 발품을 팔아 처음으로 쪽마을을 찾았다. 조그만 산골, 43가구가 모여 문명과 떨어져 살아가는 곳.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가게 하나 없으며 외국인은커녕 라오스 현지인도 잘 가지 않는 곳.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누렁이, 고양이, 멧돼지, 물소, 칠면조, 닭들이 동네 앞마당을 차지하고 앉았다. 영화 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이었다.
2008년 여름 여행을 하다 타이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와 함께 루앙프라방을 다시 찾았다. 서울은 한 달만 지나도 무섭게 바뀌는데 작은 마을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단출한 주민도 그대로고, 머물 숙소가 없는 것도 이전 해와 마찬가지였다. 아침저녁으로 루앙프라방에서 출발해 메콩강을 건너고 차를 얻어타며 그곳을 들락거렸다. 사진을 찍고, 그 다음날에는 사진을 갖다주는 일정으로 나흘인가 닷새를 그렇게 다녔다.
아이들은 여전히 낯선 외국인이 와도 놀라지 않았다. 수줍어할 뿐. 그런데 여느 라오스 아이들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 그게 무엇일까. 교육의 기회도, 할 수 있는 놀이랄 것도 없는 산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가져간 피부 연고를 하나 촌장님께 전해드리며 아이들에게 발라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해서 마음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일행이 타이 방콕에서 준비해온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꺼내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종이와 크레파스를 받아쥔 아이들이 머뭇거리기만 한다. ‘참 수줍음을 많이 타는구나’ 생각했는데, 옆에 있는 현지 친구의 해설은 달랐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봐서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러는 모양”이라고 했다. 몇 시간만 차를 타고 가면 인터넷이 되고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이 길을 누비고 있지만, 이 마을에 사는 수십 명의 아이들은 이렇게 문명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지인이 준 축구공을 조심스레 꺼냈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표정을 보니 축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듯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매일같이 이 공으로 축구를 하며 뛰어놀 수 있으리라.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삶에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이 기회에 루앙프라방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전해달라던 한국의 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길현 형, 보십시오. 형이 주신 축구공이 몽족 아이들에게 큰 선물이 됐습니다. ‘내일은 축구왕’을 꿈꾸며 하루 종일 공을 차며 놀겠지요. 형님의 작은 정성이 문명과는 떨어진 이 조그만 마을에 재미있는 변화를 가져올 듯합니다. 이곳 사람들을 대신해 인사를 전합니다. 라오스에서 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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