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모든 정치세력들이 복지 이야기로 성찬을 차리고 있다. 그런데 유독 이 잔칫상에 오르지 못하는 복지가 하나 있다. 국민연금이다. 한나라당, 민주통합당, 진보정당 어디에서도 국민연금 보험료나 급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전에 ‘국민연금 8대 비밀’로 많은 사람들이 분통을 터트렸고, 앞으로 심각해질 고령화사회를 생각하면 의외로 느껴질 수 있다. 왜 그럴까?
국민연금, 가난한 비가입자에겐 그림의 떡
첫째, 국민연금 급여를 늘릴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연금보험료를 기본 재원으로 하기에 급여율을 올리려면 보험료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 지금 누가 국민연금 보험료를 더 내자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둘째, 현재의 국민연금이 가입자에게 꽤 괜찮은 제도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민연금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가입자가 낸 보험료와 대비하면 국민연금 급여는 상당히 후한 편이다. 요사이 의무가입자가 아닌데도 국민연금에 자진 가입하는 서울 강남 주부들이 급속히 느는 것을 보면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급여 수준을 올릴 별다른 묘안도 없고, 지금 상태도 가입자에게 괜찮은 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상황에서 정치권 처지에서 굳이 현행 국민연금을 바꾸는 공약을 내놓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전체 국민의 처지에서도 국민연금이 이대로 운영돼도 좋을까? 수십 년 뒤의 국민연금기금 소진 대책을 제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에게 지금의 국민연금이 과연 공평하고 적절한 제도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지난해 8월에 쓴 ‘장수가 행복인 사회, 국민연금 개혁으로’(875호)에서 나는 국민연금이 보험료 납부자인 제도 내부자에게는 우호적이지만 보험료를 낼 수 없는 제도 외부자에게는 냉혹한 놈이라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현재 국민연금에서는 모든 가입자가 자신이 낸 보험료보다 나중에 더 많은 급여를 돌려받는다. 이미 환갑이 넘어 국민연금을 받고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그렇고, 현재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고 있는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도 그렇다. 국민연금은 급여제도가 하후상박으로 설계돼 있어서 납부한 보험료 총액 대비 급여액을 나타내는 수익비가 저소득 계층일수록 높으며, 전체 가입자 기준으로 평균수익비가 1.8배에 달한다. 현재 가치로 100원을 내고 나중에 180원을 받는 구조다. 직장 가입자의 경우에는 회사가 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하므로 본인 부담 보험료 대비 수익비는 3.6배다. 주주 이윤과 관리운영비를 챙겨야 하기에 이론상 수익비가 결코 1.0배를 넘을 수 없는 민간생명보험이 따라올 수 없는 놀라운 급여다(실제 민간생명보험의 본인 부담 보험료 대비 수익비는 약 0.8배 이하 수준으로 추정).
그런데 이러한 후한 급여가 의도하지 않은 문제를 낳았다. 혜택이 국민연금 가입자에게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매달 국민연금 보험료를 꼬박꼬박 낼 여력이 있는, 즉 노동시장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반면 경제활동인구가 아니어서 국민연금 가입 대상에서 아예 빠지거나 가입했더라도 형편이 어려워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은 대체로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자, 주부 등 경제적 취약계층으로 대략 전체 성인의 절반을 차지한다. 국민연금이 노동시장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에겐 노후 복지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제도인 셈이다. 젊은 시절 노동시장의 차별을 노후에 더욱 증폭시키는 역진적 복지제도라고 비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권의 눈에선 그냥 넘어갔으면 하는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일반 서민 처지에선 결코 방치할 사안이 아니다. 보완책으로 기초노령연금이 있지만 금액이 너무 작아 국민연금의 차별을 보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회연대전략,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사업’
2007년 1월 민주노동당은 당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공중파에서 생중계되는 대표 신년 기자회견을 했다. 소수 정당 대표에게도 다른 정당들과 동일한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는 요구가 반영돼 공중파들을 당사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당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던 낡고 조그만 당사 건물은 생중계 차량들로 부쩍였고, 좁은 복도에는 방송 케이블선이 거미줄처럼 깔렸다.
이때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이었다. 연두 기자회견이기에 한 해 정세와 다양한 의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기획실의 초안을 백지화하고, 민주노동당은 국민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보험료 지원사업을 설명하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한 해 동안 이 사업에 당력을 집중하겠다는 내용의 파격적인 원포인트 연두 기자회견이었다. 왜 민주노동당은 단일 국민연금 사업에 귀중한 연두 기자회견 시간을 모두 사용했을까?
당시 ‘보험료를 더 내고 급여는 낮추는’ 국민연금법 개정이 오랫동안 논란을 겪고 있었다. 원내 진출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던 민주노동당은 국민적 관심사인 국민연금을 소재로 획기적인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국민연금의 근본 문제라고 판단한 민주노동당은, 이 과제를 해결한다면 노후 빈곤에 직면한 서민의 지지를 얻고,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만이 발휘할 수 있는 사회연대 가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진보 진영에서 ‘사회연대전략’으로 더 알려져 있는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은 당시 중위 소득의 70%(월소득 91만원) 이하에 속하는 644만 명의 저소득 계층과 비정규 노동자에게 5년간 연금보험료를 지원해 이들이 나중에 국민연금 수급권을 지닐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 총 17조원이라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데, 기존 국민연금 가입 노동자가 4조원을 부담하고, 국가가 6조원, 기업과 상위 계층이 7조원을 책임지도록 설계되었다.
당시는 국민연금법 개정(2007년 7월 급여율이 60%에서 40%로 인하) 이전이므로 국민연금 가입 노동자들이 미래에 받을 연금 급여는 본인 부담 보험료에 비해 평균 5배로 지금보다 더 높았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즉 훨씬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계층의 노후 복지를 위해 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제도 내부 가입자들이 필요한 재정의 일부인 4조원을 책임지자고 제안했다. 이때 3조원은 사업장 가입자들이 미래에 받을 연금액 중 일부(월 1700~3200원)를 5년 동안 저소득 계층 보험료 지원분으로 전환하고, 나머지 1조원은 연봉 5천만원 이상 노동자들이 추가로 5년간 월 2천~1만4천원씩 보험료를 더 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정부, 저임 노동자 사회보험료 첫 지원
민주노동당은 대부분의 가입자들이 당장 보험료를 더 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받을 급여 중 일부 상징적인 소액을 연금회계에서 공제하는 것이기에 당의 핵심 사업으로 진행하면 당사자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고, 이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 사이에 노후를 매개로 상징적인 사회연대가 구현되기를 바랐다. 제도적으로 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조직적으론 정규직 중심주의를 극복하며, 정치적으론 진보정당이 사회적 문제 해결에 주도권을 쥐자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권영길 원내대표도 국회 본회의 대표 연설에서 이 사업을 제안하고 울산에 있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직접 방문해 사업설명회를 열고 진보적인 연금정치, 비정규직 정치, 헤게모니 정치를 역설했다.
하지만 노동자가 부담하는 4조원을 둘러싸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부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이 사업은 당 지도부의 의욕과 달리 열매를 맺지 못했다. 국가와 자본이 책임져야 할 몫을 노동자가 자임하는 것은 노동자 양보론이라는 노동계 일부의 비판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국민연금 사각지대 문제는 그대로 방치돼왔다.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점차 노후 빈곤을 향해 가고 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참여연대와 몇몇 국회의원이 사회보험료 지원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국민연금 사각지대 문제가 다시 사회적 관심거리로 등장하더니, 마침내 이명박 정부가 제출한 올해 예산안에 ‘저임금 근로자 사회보험료 지원사업’이 포함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복지 분야 예산이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정부의 정책 기조에 동의하지 않는 개혁적 전문가들도 이 사업만은 주목했다. 국회를 거치면서 사업이 정부안보다 확대돼 해당 예산이 1984억원에서 2654억원으로 늘었다. 2월부터 서울 동대문구, 전남 목표시, 제주시 등 14개 기초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시범 시행되고, 오는 7월에는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1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월 125만원 미만 노동자와 사업주에게 국민연금과 고용보험료의 2분의 1~3분의 1이 지원된다. 예를 들어 월소득 104만원의 노동자는 본인 부담 보험료의 절반인 연간 31만원(월 2만6천원)을 경감받는다.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책정된 예산에서 확인되듯, 실세 수혜 대상은 많지 않을 듯하다. 이 사업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정부 행정망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종합 관리가 중요하고, 해당 예산도 대폭 증액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보험 사각지대 문제가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보험료 지원사업이 시작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미래 복지국가를 꿈꾸는 시대다. 이왕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이야기하려면 근래 복지국가 민심을 밑거름으로 삼아 이 사업이 보편복지 차별 해소 국민운동으로 전개되면 좋겠다. 우리나라 사회보험의 역진적 현실을 고려하면, 급여 혜택을 받는 일정 소득 이상 가입자들도 보험료 지원에 참여하는 사회연대 방식이 어떨까? 5년 전 좌절되었던 민주노동당의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과 같은 국민운동 말이다.
복지국가는 사회연대 통해 만들어야
아직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개인적 소망에 불과하다는 핀잔이 돌아올 듯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이 보여주었듯 대한민국이 급속히 변하고 있다. 이제 막 복지국가의 가능성도 타진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이를 바라는 시민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야 견고하고 지속 가능하다. 미래 고령화사회에 모든 것을 국가 재정에 내맡기는 주장보다는 정부·기업·시민 모두가 복지국가의 기틀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사회연대 논리가 훨씬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복지국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와 기업에도 더 강력히 요구할 수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오건호의 복지富동’은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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