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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률 조작 의혹에 휘말린 ELS

펀드 운용사가 보유 주식 집중 매도해 고수익 상환 기회 무산시킨 사례 속속 드러나
등록 2009-08-07 11:53 수정 2020-05-03 04:25
수익률 조작 의혹에 휘말린 ELS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수익률 조작 의혹에 휘말린 ELS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주가 폭락 과정에 주가연계증권(ELS)을 판매하는 외국계 증권사가 개입했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ELS를 운용하는 외국계 증권사들이 자신들의 수익을 높이기 위해 지수를 의도적으로 하락시켰다는 것이다. 증권감시위원회가 해당 증권사 담당자들을 소집해 조사했지만 주가조작 혐의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지금 한국의 이야기 같지만 2001년 3월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다. 8년이나 지난 현재 한국에서 유사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포스코와 SK의 주가에 수익이 연동되는 어느 ELS 상품의 가입자들은 올 4월22일 연 22%라는 고수익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만기일인 이날 SK의 종가가 11만9600원 이상으로 유지되는 조건이었는데, 장중에 주가는 12만원 위에서 움직였다. 그런데 장 마감 동시호가에서 갑자기 이날 SK 주식 거래량의 40%를 웃도는 13만 주가 한꺼번에 매물로 쏟아지며 주가는 11만9천원으로 마감됐다. 불과 600원 차이로 이 펀드는 22% 수익에서 25.4% 손실로 급반전됐다. 장 막판 매물을 쏟아낸 주체는 다름 아닌 이 ELS 상품의 운용사인 캐나다 은행이었다. 금융감독원이 진상 조사에 나섰다.

한국거래소는 7월19일 미래에셋증권 등 국내 대형 증권사 3곳에 제재 조처를 내렸다. 자신들이 판매한 ELS에 연계된 주식을 집중 매도해 주가 하락으로 펀드 투자자들의 고수익 상환 기회를 무산시켰다는 이유다. 급기야 7월27일엔 ELS 조기 상환 무산으로 투자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은 한 외국계 증권사가 불법으로 손실을 일부 보전해준 사실까지 드러났다. ELS 운용사가 사실상 시세 조종을 인정한 꼴이 됐다.

ELS는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개발됐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일본에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2003년 3월 첫 상품이 출시됐다. ELS는 일종의 내기다. 펀드의 만기 중에 관련 종목의 주가가 일정 범위를 넘어설 것인지 아닐지를 놓고 판매자와 구입자가 돈을 거는 것이다. 예를 들어 1년 뒤 코스피가 지금보다 40% 이상 떨어지지 않으면 투자자가 20% 수익을 받고 반대로 그 밑으로 추락하면 40%를 물어내는 식이다.

파생상품인 ELS는 편입한 옵션의 성격에 따라 그 유형이 천차만별이지만,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과유불급형’과 ‘과공비례형’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과유불급형’은 주가가 지나치게 오르면 수익이 쪼그라들고, 적당히 오르면 상승률에 비례해 수익을 얻는다. ‘과공비례형’은 주가가 지나치게 공손(하락)하면 손실을 입고 적당히 내리면 고수익이 확정된다. 이 유형 중 대부분은 만기 도중에도 일정한 기간마다 조기 상환 기회를 주는데, 그 요건인 기준주가가 계단을 내려가듯 낮아진다고 해서 ‘스텝다운형’으로 부른다. ELS 전체 판매량의 약 70%가 ‘스텝다운형’이다. 앞에서 사고친 사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약속한 수익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주가를 고의로 떨어뜨린다는 의혹에 대해 ELS 운용사들은 가입자들에게 수익을 돌려주려면 펀드에 들어 있는 주식을 모두 팔아 현금화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주식을 팔아 상환을 무산시키는 것인지, 상환을 위해서 주식을 파는 것인지 경계가 애매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실체를 파헤치는 것은 금감원의 몫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ELS가 국내에 나온 지 6년이 넘었고 유사한 논란이 8년 전 일본에서 일어났는데도 금융감독 당국이 지금까지 이렇다 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금감원은 수익률 산정 기준을 만기나 조기 상환일의 종가가 아니라 3~5일간의 평균주가로 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시적인 대량 매물로 인한 충격을 완화시키자는 취지다. 또 ELS 편입 종목을 주가지수나 삼성전자 같은 초대형주로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유동성이 풍부해 웬만큼 물량이 쏟아져도 주가의 큰 변동 없이 소화할 수 있다는 이유다.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ELS 상품의 종류가 획일화하는 단점이 생긴다. 홍콩처럼 ELS를 상환할 때 현금 대신 주식으로 주는 방안도 거론된다. 가입자들이 펀드 청산 뒤에 해당 주식을 시장에서 직접 팔아 현금화하는 것이다. 펀드에서 손실이 났더라도 만기에 손실을 확정시키지 않고 주가가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만회를 노릴 수 있는 선택권을 투자자에게 주는 것이다. 홍콩에선 또 ELS를 거래소에 상장시켜 매매 편의성을 높였다. 상장되면 공시 의무가 강화돼 ELS 청산으로 어떤 종목이 언제 시장에 매물로 나올지 시장 참여자들이 파악할 수 있어 주가 변동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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