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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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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덥지 못한 ‘스팩’의 ‘스펙’


요즘 장안에서 기업인수목적회사가 뜬다는데…
발기인들 경력·배경에서 우려가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등록 2010-03-18 11:10 수정 2020-05-03 04:26

“못 믿겠다 스펙… 대기업 인턴제 확대”. 3월10일치 경제면 기사 제목이다. 솔직히 ‘스펙’이란 말을 몇 년 전만 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80년대 학번인 필자는 당시 헤드폰을 낀채 영어 회화 공부에 여념이 없던 여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고, 컴퓨터 프로그램 강의는 골치 아파 빠지기 일쑤였다. 그 업보로 2010년대를 살아가기가 퍽이나 고단하다.

한국의 스팩(기업인수목적회사) 1호를 선점하기 위한 증권사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스팩 1호가 합병 1호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연합

한국의 스팩(기업인수목적회사) 1호를 선점하기 위한 증권사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스팩 1호가 합병 1호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연합

요즘 스펙(spec)과 모음 하나만 다른 스팩(spac)이란 말이 경제면에 종종 나온다. 특수목적회사인 SPC에 A 하나가 추가된 스팩(Special Purpose Acquisition Company)은 기업인수목적회사다. 자금을 모아 증시에 상장시킨 뒤 쓸 만한 비상장기업을 점찍어 일정 기간 안에 합병을 완료해 수익을 나눠갖는 명목상 회사(페이퍼 컴퍼니)를 말한다. 반면 기업 인수에 실패하면 스팩은 청산되고 일반투자자는 남아 있는 돈을 돌려받는다. 스팩 주관사들은 “자금의 대부분(90% 이상)을 외부 신탁기관에 예치해놓아 여기서 나온 이자를 합하면 원금 수준으로 돌려줄 수 있다”고 말한다. ‘잘되면 큰 수익, 못돼도 본전’이라는 증권사와 언론의 홍보전에 힘입어 국내 스팩 1호인 대우스팩엔 1조원이 넘는 돈이 몰렸고, 2호인 미래스팩도 8천억원이 넘는 돈을 끌어들였다. 프리미엄을 기대한 단기투자자들이 가세한 탓도 있다. 현대, 동양 등 다른 증권사들도 앞다퉈 스팩 공모에 나서고 있다.

그럼 증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3500원에 공모한 대우스팩의 상장 첫날 종가는 3550원이었고 지금도 그 수준이다. 스팩은 공모 때 합병 대상 회사를 특정할 수 없게 돼 있다. 합병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는 그냥 현금만 보유한 ‘돼지 저금통’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가는 공모가 언저리에서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또 합병이 성사된다고 해서 항상 주가가 오르는 것도 아니다. 성장성이 낮은 기업을 합병하거나 기업 가치에 비해 높은 금액을 주고 인수한다면 주가는 되레 하락한다. 하지만 스팩을 설립한 발기인들은 일반투자자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주식을 취득했기 때문에 주가가 웬만큼 떨어져도 수익이 나는 구조다. 일반투자자와 경영진 사이의 이해가 상충하는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회사와 합병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스팩의 발기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경영진의 투자 경력과 과거 실적이 투자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다. 결국 스팩도 스펙(specification)을 보고 뽑는 셈이다. 스팩의 발기인은 산업은행과 다수의 연기금, 벤처캐피털 등이다. 핵심은 얼마나 ‘유력한’ 인물이 포진했는가에 있다. 대우스팩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사람은 사외이사로 참여한 이지형씨다. 골드만삭스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를 지낸 이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조카(이상득 의원의 아들)다. 시장에선 이씨가 앞으로 합병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본다. 대우스팩에는 서울 강남권 자금이 엄청나게 몰렸다는 보도도 있었다. 동양스팩의 이사에도 골드만삭스 출신 인수·합병 전문가가 포함돼 있다.

골드만삭스는 ‘브릭스’란 신조어를 세계에 팔아먹은 상품 메이커이자 추종 세력을 이용해 국제 유가에 거품을 만들어낸 트러블 메이커이기도 하다. 월가의 유수한 투자은행들이 쓰러진 2008년 금융위기 때도 골드만삭스가 살아남은 비결은 거미줄 네트워크에 있다. 미 정부의 금융정책 라인의 핵심에는 골드만삭스가 있다. 클린턴 정부 때 재무장관을 지냈고 오바마 정부에서 경제고문을 맡고 있는 로버트 루빈과 조지 부시 행정부의 재무장관이던 행크 폴슨 모두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 출신이다. 프랑스 일간지 는 최근 ‘세계로 뻗어 있는 골드만삭스의 그물’이란 기사에서 유럽연합 각국의 재무부 요직을 골드만삭스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리스 정부의 공공부채관리기구 수장도 골드만삭스 출신이라고 보도했다. 골드만삭스가 아닌 ‘거번먼트삭스’(Government Sachs)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골드만삭스가 화려한 스펙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스의 국가부채 축소에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골드만삭스는 다시 궁지에 몰렸다. 여기에다 그리스의 국채를 다른 나라에 팔아놓고는 뒤로는 그리스 국채의 부도 위험이 커질수록 큰돈을 버는 파생상품에 베팅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의 어느 잡지가 골드만삭스를 ‘흡혈 문어’에 비유했을까. 한국 사회가 조장하는 스펙과 월가 흡혈 문어의 스펙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 것으로 믿고 싶다.

한광덕 경제월간지 창간 준비팀장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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