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경기도 연천에서 우리나라 예비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고가 터졌다. 포사격 훈련 중 포탄이 터져 예비군 16명이 떼죽음당한 것이다. 현역시절 주특기가 포병이 아닌 예비군들을 데려다 안전교육도 안 시킨 게 화근이었다. 이 사건으로 예비군 제도 전반에 대한 여론이 비등했으나 그 뒤 동원 일수가 줄어든 것 외에 바뀐 것은 없다.
예비군 창설도 하나의 사건이 계기였다. 1968년 1월에 일어난 ‘1·21사태’다. 김신조 등 북한 특수공작원 31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에 놀란 박정희 대통령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3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 터지면서 미국이 1·21사태에 대한 언급을 꺼리자 박 대통령은 독자적으로 강경한 대북 제재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가 ‘유엔 중심에서 자주적 국방 태세로의 전환’, ‘예비군 250만명 무장화’ 등이었다. 초기에 예비군 무장은 미군이 폐기한 칼빈 소총과 M1 소총 100만정, 실탄 5천만발을 무상지원 받아 해결했다.
전쟁 등 국가비상사태 때 작전수요를 위한 동원에 대비하거나 무장공비 토벌, 주요 시설 경비 등이 주요 임무인 예비군은 임무별로는 동원예비군과 향방예비군으로, 편성 형태별로는 직장예비군과 지역예비군으로 나뉜다. 부사관·장교는 계급별로 40∼56살까지 소집대상이며 병사·대체복무자 등은 제대한 다음해부터 8년 동안이다.
출범 당시 250만명 정도의 규모로 시작한 예비군은 현재 300만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4천여명의 초급장교 출신 예비군 동(읍·면)대장들과 그 비슷한 수로 추정되는 직장예비군 중대장의 관리 아래 있다.
1971년 대선 때 예비군 제도는 큰 이슈로 부각됐다.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폐지’ 공약을 내걸어 많은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30년 세월이 흘러 예비군 폐지를 주장한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돼 임기의 끝을 바라보고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제도 폐지는커녕 개혁 방안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순혁 기자/ 한겨레 편집2부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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