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있는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의 126개 섬과 운하, 이들을 연결하는 다리들로 이뤄진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5만 명이 거주하는 이곳에 매년 2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오버투어리즘을 막기 위해 얼마 전부터 시 당국은 방문객에게 5유로의 입장료를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교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가 유럽과 세계사를 이끌면서 축적한 풍부한 역사에 매료된 관광객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은행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뱅크’(bank)는 중세시대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활동하던 금융인들의 고정식 탁자 방코에서 유래했고, 오늘날 전세계 기업의 회계 원칙인 복식부기는 15세기 베네치아의 루카 파치올리가 고안한 것입니다. 유럽을 아랍 세계 및 인도와 연결하는 무역은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 베네치아의 상인이 독점했습니다. 또 베네치아의 작은 섬 무라노는 13세기 이래 유리공예의 중심지였습니다. 고작 유리 따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당시 유리와 거울은 유럽 왕실과 귀족을 사로잡은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무라노 유리직공>은 17세기 베네치아의 유리와 거울의 제조를 둘러싼 목숨을 건 싸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30대 여성 노라 마닌입니다. 노라의 어머니 엘리너는 런던 킹스칼리지의 미술사학자인데 1970년대에 베네치아의 카포스카리대학 교환교수로 근무했습니다. 그 시절 뱃사람 브루노 마닌과 사랑에 빠져 딸 레오노라 마닌을 낳았습니다. 베네치아의 위대한 유리 마에스트로 코라도 마닌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가진 브루노는 런던에 함께 가자는 엘리너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엘리너는 얼마 뒤 브루노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런던에서 딸의 이름을 영어식인 노라로 바꾸고 홀로 키웠습니다. 미술을 전공하고 유리공예에 흥미를 느끼던 노라는 남편의 외도로 결혼 생활이 파경에 이르자 런던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유리 작업을 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떠납니다. 노라의 목에는 마닌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진 브루노가 엘리너에게 선물한 하트 모양의 유리 목걸이가 걸려 있습니다.
소설의 공간적 무대는 베네치아로 단순하지만 시간적 배경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은 21세기 노라가 ‘유리의 진정한 본질도 모르고 광고 효과만 좋은 예쁜 여성’이라는 편견과 맞서 싸우며 유리공예가로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편은 17세기 코라도 마닌에 의해 절정에 달한 베네치아 유리 예술과 유리 사업의 독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400년의 시차를 둔 두 이야기는 노라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교차하며 서서히 실체를 드러냅니다.
베네치아 귀족 집안의 코라도 마닌은 어린 시절 부모가 정치적 음모에 휩쓸려 살해당했을 때 무라노 유리 제작 책임자 자코모 델 피에로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코모의 문하생이 된 코라도는 젊은 나이에 최고의 유리 마에스트로에 등극합니다. 그가 만든 유리 샹들리에, 화병과 액세서리도 매우 인기가 높았지만, 가장 귀한 것은 대형 거울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거울이 흔하지만 17세기에 티 없는 거울 제작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대형 거울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무라노 공방에서만 제작이 가능했습니다.
태양왕으로 불렸던 루이 14세는 번영하는 프랑스의 영광과 절대왕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했습니다. 총공사비는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무려 2조원가량이 들었다고 합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17개의 아치로 구성된 73m 길이의 ‘거울의 방’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이곳을 장식할 357개의 최상급 거울을 베네치아에서 조달해야 했는데,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재무부 장관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베네치아에 비밀요원을 파견해 유리직공을 프랑스로 빼올 계획을 세웁니다.
베네치아에서 유리직공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1291년 베네치아 정부는 화재 위험을 이유로 모든 유리를 무라노 섬에서만 제조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유리 용해로에서 번진 불길이 여러 차례 베네치아를 삼킬 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모든 유럽이 탐내는 유리 제조 기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리직공들은 마에스트로부터 수습공까지 모두 무라노 섬에 갇혀 평생 유리를 제작해야 했고,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섬 밖으로 외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베네치아 정부의 비밀요원들이 유리 직공을 감시했습니다. 유리 직공 입장에서 무라노는 사실상 감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코라도는 프랑스 왕실이 제안한 돈과 화려한 생활에는 넘어가지 않았지만, 베네치아 보육원에서 자라는 어린 딸과 함께 파리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유혹에는 무너졌습니다. 프랑스의 비밀작전을 통해 파리에 도착한 코라도는 열정적인 제자 자크 쇼비르에게 비법을 전수하면서 거울의 방을 채울 거울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첫 시제품을 설치하던 날 예정에 없이 루이 14세가 일행을 이끌고 직접 현장을 방문합니다. 모두가 빛나는 거울에 찬사를 보내지만 단 한 명은 몹시 마음이 언짢습니다. 파리 주재 베네치아 대사 발다사르 길리니입니다. 길리니는 무라노 출신 유리공이 프랑스를 돕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도제(Doge,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에게 다급하게 밀서를 보냅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부디 서두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유리의 독점을 잃게 될 것입니다’라는 경고였습니다.
베네치아의 비밀요원들은 죽은 줄 알았던 코라도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곧 코라도가 베르사유에서 비밀리에 거울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길리니 대사는 코라도를 조용히 만나 베네치아로 돌아오지 않으면 딸이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결국 코라도는 다시 한 번 베네치아행 배에 오릅니다. 21세기 노라의 목에 걸린 하트 모양의 유리 목걸이는 코라도가 딸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베네치아인들은 더 나아가 유리와 거울 제조의 비법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코라도의 프랑스인 제자 자크 쇼비르를 암살합니다.
피오라토의 <무라노 유리직공>은 소설이고 세부 사항은 당연히 작가 상상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베네치아 최고의 상품이 유리와 거울이었다는 것, 그 제조 기밀을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 정부가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했다는 것, 프랑스 왕실이 무라노의 유리 전문가들을 몰래 빼왔고, 베네치아의 암살자들이 이들을 추적해서 살해했다는 것은 모두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흥미로운 경제사의 한 장면을 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마리나 피오라토는 1973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영국인 어머니와 베네치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과 베네치아의 대학에서 역사와 셰익스피어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2003년 런던의 단칸방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던 피오라토는 카페에서 데뷔작 <무라노 유리직공>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싱글맘이었던 제이케이(J.K.)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카페에서 써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는 이야기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무라노 유리직공>은 수없이 퇴짜를 맞은 후에야 2008년 어렵사리 독립출판사 뷰티풀북스를 통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출간 직후 (<해리 포터>만큼은 아니지만) 베스트셀러가 됐고 18개국에 번역돼 출간됐습니다. 이후에도 피오라토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을 여섯 편 더 썼고, 영화 비평과 유투(U2)와 롤링스톤스 등 록밴드 투어 그래픽 디자인에도 참여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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