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서 소설을 통해 자본주의 초기 3대 금융버블(거품) 중 둘을 살펴봤습니다. 네덜란드 튤립 마니아를 소재로 한 <튤립 피버>와 프랑스 미시시피 버블을 무대로 한 <거대한 도박>입니다. 데이비드 리스의 <종이의 음모>는 나머지 하나, 1720년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버블의 광기와 음모를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벤자민 위버는 ‘보호자, 감시인, 법집행관, 고용치안관, 도둑잡이’를 자처하는 이십 대 후반의 유대인입니다. 그중 도둑잡이가 가장 수지맞는 직업입니다. 런던에 정식 경찰이 도입된 것은 백 년도 더 지난 1829년이었습니다. 이 시기 피해자가 물건을 되찾거나 복수하려면 민간 도둑잡이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벤자민은 한때 ‘유다의 사자’로 불리며 명성을 날리던 권투 선수 출신이고 본인이 밀수, 도둑, 강도 짓까지 한 적 있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흉악범을 상대하기 좋은 인물을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719년 10월 벤자민에게 두 의뢰인이 각각 찾아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청년 윌리엄 벨포는 유산자인 젠틀맨 계급 출신입니다. 자신의 아버지 마이클이 얼마 전 살해당했는데, 범인들이 자살로 꾸몄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영란은행(영국의 중앙은행)과 남해회사의 경쟁을 이용해 투자로 번 돈을 가로채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의심합니다. 더 나아가 비슷한 시기에 교통사고로 죽은 벤자민의 아버지 사무엘도 같은 범인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벤자민에게 수사에 나서달라고 강권합니다. 사무엘은 런던의 공인 주식중개인이었습니다.
벨포에게 벤자민을 소개한 오웬 네틀턴 경은 도박과 매춘을 즐기는 사십 대 귀족입니다. 그는 벨포보다 이틀 앞서 다른 사건을 들고 벤자민을 방문했습니다. 술에 취해 게이트 콜이라는 성매매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는데 콜이 시계, 구두, 가방, 현금, 검, 수첩 등 모든 것을 갖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네틀턴 경은 통상적인 보수의 두 배를 주겠다며 수첩을 꼭 되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벤자민은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을 이끄는 숙부 미구엘의 도움으로 배경이 되는 금융에 대한 이해를 넓혀갑니다. 그의 수사가 본격화하자 런던 금융계에 미묘한 파장이 일어납니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네이선 에이들먼은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 주식 중개를 하는 유대인입니다. 남해회사 투자자인 그는 벤자민에게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위협합니다. 영란은행 이사 퍼시벌 블로스웨이트는 남해회사가 사악한 짓을 할 수 있다고 암시하고 정보를 가져오면 영란은행이 섭섭지 않게 보답할 거라고 회유합니다.
이 시기 런던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대영제국의 심장부로 급성장했습니다. 1716년 인구 63만 명으로 유럽 대륙 최대 도시 프랑스 파리와 비슷했고, 곧 이를 추월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명예혁명에 대한 찬성과 반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극렬했고 계급 관계는 요동쳤습니다. 신문과 소식지가 넘쳐났고 카페와 술집은 번성했습니다. 범죄와 폭력도 늘었습니다. 이 소설은 경제와 금융을 축으로 하면서도 이런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생생하게 다뤄 흥미를 더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당시 영국이 처한 경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01년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는 유럽의 패권을 둘러싸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돌입합니다. 영국 왕 제임스 3세는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느라 빚더미에 오릅니다(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유일하게 은행권을 발행하던 영란은행은 영국 국채 중개를 독점해 수익을 올렸습니다. 1711년 재무부 장관 로버트 할리가 남아메리카 무역을 독점하는 남해회사를 설립하고 초대 총재로 취임합니다. 당시 남해는 남아메리카 일대 바다를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할리는 내심으로는 이 회사에 영국 국채 관리를 맡기려 했습니다.
남해회사는 영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 국채 투자자들이 국채를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합니다. 오늘날 부채의 지분으로의 전환(Debt-to-Equity Swap)이라고 알려진 금융 기법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남해회사가 수익성이 좋은 회사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으로 남아메리카에 아프리카 흑인을 공급할 수 있게 된 영국 왕실은 남해회사가 독점적으로 이 사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1718년부터는 국왕이 직접 남해회사 총재를 겸해 힘을 실어줬습니다. 결국 1720년 대규모로 증권 전환이 이뤄지고 남해회사는 영란은행과 함께 영국 국가부채를 관리하는 핵심 기관으로 부상합니다. 그러나 흑인 노예무역은 수지가 맞지 않았습니다. 남해회사는 한 번도 제대로 이익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적극적인 주가 부양 정책으로 1720년 상반기 주가는 폭등합니다. 하지만 실적이 없는 회사의 주가가 계속 오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9월 들어 급락합니다. 영국 정부는 국채의 80%를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해 채무 부담을 대폭 줄였으니 최고의 승자입니다. 벤자민은 격랑의 시기에 숨겨진 음모를 하나씩 밝혀내고,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반전을 거듭합니다.
당시 주식 거래는 왕립거래소(Royal Exchange)에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698년 ‘증권 브로커들이 주가를 조작하기 위해 정치와 외교에 대한 거짓 소문을 유포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파멸하게 한다’는 이유로 거래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브로커들은 거래소 인근 몇몇 커피하우스에 모여 주식 거래를 재개했습니다. 이 골목이 훗날 ‘증권거래 골목’(Change Alley)으로 불립니다. 조너선 커피하우스가 가장 유명했는데, <종이의 음모> 속 여러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납니다.
남해회사 버블은 금융계 외부 저명인사들의 투자로도 유명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이작 뉴턴 경입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도 유명하지만 죽기 전 삼십 년 동안 왕립조폐청장으로 근무하면서 화폐위조범과 싸웠습니다. 뉴턴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화폐를 정상화하는 주화 대개주(改鑄) 작업의 책임자였습니다. <종이의 음모>에도 나오는 테두리가 갈려져 나간 은화가 바로 악화입니다. 남해회사 주식을 일찍부터 매입했던 뉴턴은 1720년 4~5월에 충분히 올랐다고 생각해 전량 매각했습니다. 투자금의 몇 배에 이르는 이익을 냈습니다. 하지만 뉴턴조차 대중의 광기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도 주가가 계속 오르자 6월부터 팔았던 가격의 두 배로 많은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결국 주가가 폭락해 큰 손실(현재 화폐가치로 2천만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을 입고 ‘나는 천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남해회사 주가 추이’(그림 참조)에서 뉴턴의 거래 시점을 짚어보면 아찔할 정도입니다.
반면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보유한 남해회사 주식을 버블이 터지기 몇 달 전에 대부분 매각하고, 그 후 재매입하지 않아 상당한 이익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영란은행 박물관에는 헨델의 당시 거래내역을 담은 통장이 전시돼 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출판인 토머스 가이는 남해회사 투자로 번 막대한 자금을 출연해 가이병원(Guy’s Hospital)을 설립했습니다. 그때 설립된 병원은 영국 최고 병원 중 하나로 지금도 운영 중입니다.
문인들은 투자와 저술 양방향에서 활약했습니다. 대니얼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적극적인 투자자였으며 금융계 현안에 대해 많은 기사를 썼습니다. ‘증권 딜러의 사악함 탐사’(1701)나 ‘증권거래 골목 해부’(1719)와 같은 글들입니다. 디포는 1719년에는 프랑스의 미시시피 회사 계획에 대해 결점과 불안정성을 고발하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남해회사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모순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영국 대표적인 고전주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남해회사의 주식이 정점에 이른 때 주식을 사들이고 동료 시인 레이디 몬터규에게도 매입을 권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주식이 폭락하자 그는 ‘망할 놈의 남해회사’(The Damn’d South Sea)라는 시를 써서 울분을 토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큰 투자 손실을 본 뒤 ‘남해회사’라는 스탠자(4행 이상의 각운이 있는 시구)를 썼습니다. 마지막 연은 이렇습니다. ‘온 나라가 너무나 너무나 늦게 알게 되었네. 그 모든 비용과 고통이라니. 경영자들의 약속은 바람처럼 가벼운 것이었네. 남해회사 그 강력한 버블이라니.’
소설 제목의 ‘종이’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영국 정부의 국채, 영란은행이 발행한 은행권, 그리고 남해회사의 주식을 모두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미구엘이 벤자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영국에서는 돈을 주겠다는 약속이 돈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여기에서 돈은 금과 은 같은 귀금속 화폐입니다. <종이의 음모>는 18세기 초 각종 금융 약정을 담은 문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혼란의 시기를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그려냈습니다.
데이비드 리스는 1966년에 태어난 미국 작가입니다. 리스는 컬럼비아대학에서 18세기 영국인들의 돈의 인식에 대한 영문학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당시의 문헌들을 샅샅이 뒤지지만 속시원한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해회사 버블’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폭발적 광기와 불안을 묘사’하기 위해 스스로 소설 <종이의 음모> 집필에 나섰다고 합니다. 2000년 출간과 동시에 언론의 호평을 받았고 에드거상 신인 소설상을 받았습니다. 스릴러 분야의 권위 있는 상입니다. 이후 ‘소설가로 실패하면 다시 공부해서 교수가 되지 뭐’라는 생각으로 대학원을 중단하고 전업작가로 변신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 <부패의 풍경> 등 여러 편의 역사소설이 계속 성공하여 다행히(?) 아직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어판은 2006년 서현정의 번역으로 대교베텔스만에서 출간됐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소설로 읽는 경제학: 일반인은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경제와 금융 종사자는 소설에 매력을 느끼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글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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