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은 ‘콜럼버스의 날’이다. 1492년, 그가 오늘날 아메리카로 알려진 대륙에 발을 내디딘 날이다. 위대한 미국이 그의 발끝에서 시작된 날이니, 국경일로 삼아 대대손손 기념할 날이겠다. 그러나 이날은 산타가 온 날이 아니다. “긴장해 다들… 넌 이제 모두 조심해보는 게 좋아”라는 서태지의 노랫말처럼, 콜럼버스의 총 끝에서 원주민의 학살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가 되고,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격리되기 시작한 날이다. 그러나 기억의 힘은 때론 총탄보다 강하다. 잊히지 않는 기억은 결국 망각된 역사를 살려냈고, 꼭 500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콜럼버스와 원주민을 같이 기억하게 되었다. 더러는 콜럼버스 대신 원주민을 추억하기 시작했고, 어떤 주들은 아예 콜럼버스의 날을 국경일 목록에서 제외했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날은 미국을 기억의 두쪽으로 나누는 날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기억이 엇갈리는 그날, 나는 미국의 핵심 권력이 정렬해 있는 워싱턴의 펜실베이니아 길을 걸었다. 백악관으로 마치 빨려들어가는 듯한 그 길에는 정치권력만 도열해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 경제권력도 만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그 길목에 서 있다. 세계 대공황의 뼈아픈 교훈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1944년에 만들어진 아픔과 희망의 기관들이다.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같이 태어난 ‘쌍둥이’인지라, 펜실베이니아 길에 나란히 사이좋게 자리잡았다. IMF는 세계 통화의 안정을 맡고, 세계은행은 개발과 빈곤 퇴치를 맡았다. 연례총회도 같이 개최하면서, 형제의 우애를 확인한다.
한 가지만 있는 기적의 정책 메뉴그래도 맏형은 IMF인지라, 세계은행보다 한 발짝 앞서 자리잡고 있다. 창백하리만큼 무표정한 IMF의 얼굴을 기억하는 나라가 많다. 크고 작은 금융위기가 올 때마다, 제 나라에서는 권세 좋은 이들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도움을 청했다. 답례를 게을리하지 않는 IMF는 전문가들을 돈다발 들려서 보냈다. 그들의 도착 일성은 “널 위한 기적이 어여 오길 이 마을에”였고, 워싱턴에서 준비해온 “기적을 만드는 정책 메뉴”를 전해주었다. 그 메뉴에는 특이하게도 한 가지 음식만 있었고, 그것은 또 한결같이 다이어트 음식이었다. 흥청망청 살아왔으니, 이제 뱃살을 빼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배불렀던 이들에게는 당연한 처방이었겠으나, 경제위기로 이미 먹고살기가 막막한 서민들에게도 예외 없이 다이어트 처방이 떨어졌다. 원인을 제공한 이들의 뱃살은 더 늘어갔다는 얘기도 더러 들렸다. 워싱턴에서 찾아온 콜럼버스였다.
세계은행은 때론 맏형에게 질투를 보였지만, 바깥일에는 보조를 잘 맞추는 동생이었다. 형이 찾아나선 나라에는 길을 같이하면서, 형의 다이어트 처방으로 경제가 버틸 수 있도록 외과적 처방을 내었다. 흔히들 ‘구조개혁’(Structural Reform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한마디로 경제위기 또는 저성장이라는 경제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제 발로 설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헬스장 트레이너 역할을 했다. 허약한 이가 몸을 만드는 일이야 당연지사이겠지만, 훈련 내용이 특정 부위만 겨냥했다. 민영화, 무역 자유화, 노동시장 규제 완화, 자본이동의 자유 등을 집중적으로 주문했다. 몸이 멀쩡할 때도 쉽지 않은 일이라서 선진국들도 골머리를 앓고서 겨우 부분적으로 시행했던 것들인데, 몸이 부실하다 못해 쓰러질 지경인 경제 체질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가혹한 훈련이었다. 가벼운 감기 몸살을 앓던 경제도 이들이 몰고 온 찬바람에 고질병을 앓는 일이 생겨났다. 콜럼버스는 혼자 오질 않았다.
백악관의 돌봄을 받는 쌍둥이 형제펜실베이니아 길을 계속 걷다보면 백악관이 나온다. 바로 그 옆에는 재무성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은행 현관에서 내처 달리면 5분 만에 도착할 거리다. 하지만 가까운 것은 물리적 거리만은 아니다. IMF-세계은행 쌍둥이 형제는 백악관을 등에 업은 재무성의 돌봄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뜻도 맞았다. 세 기관이 뜻을 모으면, ‘삼위일체’의 소문은 펜실베이니아 길 너머로 개발도상국에 순식간에 퍼져갔다. 그 소문 뒤로는 ‘삼위일체’의 정책들이 따랐다. “밤새 고민한 새롭게 만든 정책 어때, 겁도 주고 선물도 줄게, 온정을 위한 세상에”라는 노랫말이 들렸다. 뒷골목에서는 모두들 소리를 낮추었고, 그게 바로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했다. 세상의 경제는 워싱턴에서 설계되고, 바다 건너 먼 곳에서 집행됐다.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부활했던 1980년대 이후, 워싱턴 컨센서스는 무소불위의 힘이었다. 저항도 뒤따랐다. 세계화와 워싱턴의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운동이 활력을 얻으면서, 그들의 정책 때문에 고통받는 개발도상국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려 했다. 전세계의 중앙은행장과 경제장관이 IMF와 세계은행의 연례총회에 참석하고자 펜실베이니아 길로 모여들면, 성난 시위대도 그들을 맞으러 모여들었다. 중무장한 경찰도 같이 집결했다. 총회 회의장에는 시위대의 목소리가 좀체 들리지 않았다. “울지 마 아이야, 애초부터 네 몫은 없었어…. 아직 산타를 믿니?”
2014년 펜실베이니아 길은 우울하다. 2007년 경제위기로 인해 ‘워싱턴 삼위일체’도 위기다. 세계경제를 감시한다는 IMF는 경제위기를 예측하지 못해 체면을 구겼다. 세계은행도 같은 처지다. 최근 부쩍 목소리를 높이는 신흥개발도상국들의 도전이 거세다. 워싱턴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제가 그나마 성장했다면서 때로는 난리법석까지 부린다. 미국 재무성의 처지도 어렵다. 현재 경제위기는 미국에서 시작했으니, 세계경제의 지도자라는 지위가 옹색해졌다. 게다가 중국이 급속도로 부상하면서 ‘유일한 지도자’ 지위까지 도전하고 있다. 그동안 재무성의 돌봄 안에서 평안했던 IMF와 세계은행 쌍둥이 형제도 예전 같지 않다. 워싱턴 바깥쪽 눈치 보는 일이 늘었다. 더 이상 시위대도 보이지 않고, 경찰은 잡담으로 한가하다.
미풍조차 느껴지지 않는 지역사무소변화도 있었다. IMF는 경제위기 이후 자본 이동이 능사가 아님을 인정하고 자본 규제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금융시장 규제의 중요성도 설파했고, 소득불평등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고 했다. 급기야 미국과 일본에는 최저임금 정책 등을 통해 임금을 획기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예전에는 경제가 성장하려면 불평등이 필요하다고 했고, 최저임금은 반시장적이라고 했다. 세계은행에서도 하위 소득층 40%의 소득 향상과 빈곤 퇴치에 초점을 맞춰 대규모 구조개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어쩌면 변할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워싱턴에는 따가운 시선으로 인한 변화의 바람이 불지만, 실제 IMF와 세계은행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지역사무소에서는 미풍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의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급히 결성된 IMF-세계은행-유럽중앙은행(ECB) ‘삼총사’는 예전의 콜럼버스 같은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과거 미국 재무성이 자처했던 군기반장 역할을 이번에는 독일이 자처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경제예측의 마수도 변하지 않았다. IMF는 지난해 10월 세계경제의 본격적인 회복을 예측하고, 적극적인 재정 및 통화 정책을 기반으로 한 케인스주의적 수요관리 정책에서 벗어나 구조개혁 정책으로 전환하도록 촉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이제 가세했고, 세계은행도 보조를 맞추었다. 그 결과 올해 초부터 시장규제 완화, 재정지출 축소, 조세 삭감 등을 핵심으로 하는 구조개혁 정책의 열풍이 거세었다. 급기야 보수당이 정책을 잡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의장국으로 있는 주요 20개국(G20)에서는 올해 구조개혁이 주요 기치로 떠올랐다.
이후 세계경제는 악화 일로다. IMF는 올해에만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두 차례 하향 조정했다. 유럽에서는 성장이 아니라 장기정체(Secular Stagnation)의 위험이 높아졌고, 선진국의 오랜 경기침체의 영향이 이제 개발도상국으로 확산돼 이들 국가의 성장도 하향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IMF는 올해엔 여러 가지 예측하지 못한 요인들로 어려울 뿐 내년부터는 좋아질 거라고 보고 있다. IMF는 경제위기 이후 줄곧 “내년에는 좋아질 거야” 하고 속삭여왔다. IMF 경기 예측 모델은 계속 실패하고 있음에도, 그 모델이 실패했다고 판단하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의 지도자들은 ‘늘 틀리는’ 모델에서 나온 결과에 기초해 경제정책을 논의하고 그들의 국민에게 설명하고 있다. 공동의 문제에 대한 방향도 집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경제‘과학’의 외관을 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믿음’과 ‘편견’이 번뜩인다. 이런 것을 보는 날이 경제정책의 ‘핼러윈 축제’다.
과학의 외관을 한 편견, 핼러윈 축제1시간여 만에 펜실베이니아 길의 끝에 도달했다. 콜럼버스의 날에 대한 성찰이 가을이 완연할 이 길에도 올까. 오늘날 경제는 국제적 조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워싱턴 쌍둥이 형제의 개혁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내부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제법 높다. 하지만 이것이 콜럼버스의 날이 겪은 존재 부정으로까지 연결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간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결과는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서태지가 노래하지 않았나? “나 역시 몸만 커진 채 산타가 되었어. 이것 봐, 이젠 내 뱃살도 기름지지. 이젠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게(꿈 깨).”
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보았다. 내 기름진 뱃살도.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이 글에 인용된 노랫말은 서태지의 신곡 (Christmalo.win)에서 온 것이다. 필자는 글의 가제로 ‘Economalo.win’을 붙여 보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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