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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또 말다툼을 했을까?

상놈의 품삯을 터무니없이 적게 준 양반과 김구 선생의 언쟁… 자유시장경제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오래된 지금의 이야기’
등록 2015-05-14 18:17 수정 2020-05-03 04:28

세상일이 그렇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옳다고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가령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면 그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길 가는 이를 잡고 물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온 인류가 동의한다는 이치를 실현하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얼마를 주어야 공정하냐는 문제를 두고 머리를 긁적거려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얼마를 주어야 공정한가
더홀릭컴퍼니 제공, 한겨레

더홀릭컴퍼니 제공, 한겨레

그 고민의 역사는 자못 길다. 천하의 백범 김구 선생도 이렇게 사소하고도 중요한 문제로 고민했다 한다. 에 기록되어 있다. 백범이 한국인을 괴롭히던 일본인 하나를 살해하고 도망자 생활을 할 때였다. 갈 데는 마땅치 않고 추격은 거세지니, 서둘러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하여 전남 해남에서 양반 윤씨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이 점점 식민지 나락으로 빠져들 때니, 은신처를 제공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시절이었다. 그런데 양반 윤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매일 아침 문안 인사 삼아 전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백범은 이 주인집 양반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상놈’의 품삯 문제 때문이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밤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백범은 주인 양반의 추상같은 호령 소리에 간간이 섞여 나오는 매질 소리를 들었다. 놀라서 바깥으로 나가보니, 윤씨는 어떤 사람을 묶어두고 매질을 해대고 있었다. 하도 그 광경이 기괴해서 자세히 보니, 윤씨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일꾼이 다른 양반의 집에서 일하며 품삯을 더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잡아다 가혹한 형벌을 주고 있었다. 일꾼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그저 잘못했다고 빌고만 있었다.

천하의 백범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윤씨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이 정한 품삯은 얼마고, 저 일꾼은 얼마를 올려받았소?” 윤씨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올해에는 여자에게 두 푼, 남자에게 서 푼을 주기로 했는데, 글쎄 이놈이 남의 집에 가서 한 푼을 더 올려받지 않았겠소.”

백범은 놀랐다. 자신이 도망다니며 주막에서 먹던 거친 밥 한 끼 값도 안 되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것 보시오. 내가 다녀보니 주막에서 밥을 먹어도 다섯 푼이나 여섯 푼은 내야 하던데, 그 반도 안 되는 돈으로 이 사람과 그 식솔들이 어떻게 먹고산다는 말이오.”

불쌍한 처지를 어여삐 여겨 숙식을 제공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백범에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주인장 윤씨는 감정을 애써 삭이며 설명했다. “이보시오,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모르오. 이놈이 혼자 살고 있소? 혼인을 해서 아내도 있지 않소. 그래서 이놈이 우리 집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놈 아내도 와서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단 말이오. 그 식솔까지 와서 밥상을 차지하고 있는 날이 많소. 이놈이 일이 없을 때는 그놈 아내가 우리 집 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 집 식구는 매일 우리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셈이오. 그러니 내가 품삯을 많이 줄 까닭이 어디 있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품삯이 지나치게 낮은 게 아닌가 하고 백범은 생각했다. 또 남의 집에 가서 품삯을 조금 더 받았다고 매질을 해대는 것은 무슨 해괴한 일인가. 백범이 이렇게 따지려는 차에, 윤씨는 틈을 주지 않고 몇 마디 더 붙였다. “그리고 내가 품삯을 박하게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혹 내가 품삯을 많이 준다고 해봅시다. 그리하면 이 일꾼의 의식주가 풍성해지지 않겠소. 먹고사는 게 편안해지니 여유도 생길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이놈이 우리 양반에게 공손치 않게 될 것 아니겠소. 이들이 양반에게 따지고 덤비면서, 품삯 주는 양반 고마운 줄 모르면 어떡한단 말이오. 이 세상이 어려워질 것 아니오. 내가 이런 것을 염려해서 품삯을 이같이 정해주는 것이오.”

“여유가 생기면 공손치 않게 될 것이오”

이쯤 되니 백범은 할 말을 잃었다. 윤씨의 멱살을 잡을 분위기는 아니었을 게다. 전후 맥락을 보아서는, 윤씨의 항변에 질려 백범은 자리를 피한 듯하다. 이 일화의 마지막에 백범은 간단한 소회를 붙였다. 그동안 황해도 해주에서 상놈 천시한다고 한탄했는데, 여기 남도에 와서 보니 해주는 ‘상놈의 낙원’이었다는 것.

100년도 족히 넘은, 자칫 고리타분할 수도 있는 백범의 일화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우선 양반 윤씨는 일하는 사람이 품삯을 마음대로 올리는 것이 마땅치 않다. 사람 데려다 쓰는 사람치고, 품삯 올라가는 걸 마냥 좋아할 이는 드물다. 하지만 이 품삯 인상은 주인 양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가 데리고 일하는 일꾼이 다른 데 가서 일할 때 거기서 품삯을 올려받았기 때문이다. 양반 윤씨의 돈주머니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일꾼을 묶어두고 매질을 할 정도로 주인 양반 윤씨가 화를 낸 이유는 무엇인가? 당사자에게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몇 가지 유추를 해볼 수 있겠다. 먼저 품삯은 고용주인 자신이 정하는 것이고, 이렇게 정해진 것이 바로 공정한 품삯인데, 이 암묵적 규정을 일꾼이 위반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에 비춰보면 일종의 법률 위반이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고용주가 정한 ‘시장 법칙’을 위반했다는 얘기겠다. 그래서 일꾼에 의한 일방적 품삯 인상은 징벌 대상이 된다.

하지만 주인 양반이 화가 난 데는 경제적 이유도 컸을 것이다. 다른 고용주가 이미 품삯을 올려 지불했으니, 앞으로 이 일꾼을 부릴 때 자신도 품삯을 올려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꾼을 매질로 징계해 그 가능성을 원초적으로 제거하려는 것이리라.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노동 수요가 증가해 임금이 늘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이것이 주인 양반에게는 말하자면 ‘불편한 진리’였던 셈이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시장 법칙을 폭력적으로 저지하려는 심산이다. 요컨대 백범이 보기에 ‘가혹한 형벌’의 이면에는, 권위도 수호하고 경제적 이익도 지키려는 주인 양반의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백범은 이런 전횡이 못마땅했다. 다혈질인 그였지만 도망자의 처지고 은혜를 받는 입장이라, 양반 윤씨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품삯을 올려야 할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나섰다. 우선 백범은 윤씨가 고용주로서 품삯을 결정한 권리는 있다 하더라도, 그 품삯이 일꾼이 먹고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 푼에서 너 푼으로 30% 이상 ‘파격적으로’ 오른 품삯이라도 일꾼 혼자 살기도 빠듯한데,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품삯이 최저가족생계비에 못 미친다는 얘기다.

양반 또는 기업의 복잡한 계산

SBS 화면 갈무리

SBS 화면 갈무리

그러나 양반 주인 윤씨는 백범의 주장을 두 가지 근거에서 반박한다. 첫째, 현재 품삯 수준이 최저가족생계비에 못 미치지만, 일꾼이 일할 때마다 가족들이 모두 와서 공짜로 식사를 해결하기 때문에 실제 품삯은 너 푼을 거뜬히 넘어선다. 현대 용어로 표현하자면, 식사 제공이라는 현물임금(in-kind payment)을 고려한 총임금은 최저가족생계비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좀더 근본적이고 정치적이다. 양반 윤씨는 품삯의 ‘지나친’ 상승을 경제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로 보았다. 품삯이 상승해 최저가족생계비도 넘어서서 일꾼 가족이 조금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면, 기존 양반-상놈의 상하관계가 도전받을 위험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반 윤씨가 생각하는 ‘공정한’ 품삯은 일꾼과 그 가족의 생존이 겨우 가능할 만한 수준이었다. 일종의 생존임금(subsistence wages)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일종의 체제 반란적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그가 ‘공권력’을 행사해 일꾼을 매질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어이없는 옛날 얘기라 치부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1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 백범과 윤씨가 품삯을 두고 벌인 말싸움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임금은 누가 결정하는가? 윤씨는 고용주인 자신이 정한다고 했다. 주는 대로 받는 게 임금이다. 일꾼이 나설 일이 아니다. 윤씨는 임금을 ‘흥정의 대상’으로 하면 사회·경제 질서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에도 그다지 낯설지 않다. 노동자가 생계비 보전을 위해 고용주와 협상에라도 나서려 하면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이가 많다. 기업이 알아서 임금을 정해줄 텐데 노동자가 이를 믿지 않는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기업에 대한 정면 도전, 심지어 국가 경제에 대한 해악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백범의 일화에 나오는 일꾼처럼 마땅히 품삯을 올려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일꾼에게 돌아오는 것은 품삯 인상이 아니라 가혹한 매질이다. 임금 인상 요구에 공권력의 매질이 돌아오는 상황과 별다를 바 없다.

윤씨는 노동자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고임금은 경제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다. ‘배부른 노동자’는 통제하기도 힘들고 생산성도 떨어진다는 생각이 늘 잠복해 있다. 노동자는 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그러다보면 임금에 대해 야박해지기 마련이다. 천문학적 이윤을 올린 기업이 주주에게 넉넉하게 이윤을 배당하고 최고위급 임원들에게 성과급을 나눠주는 것은 극히 정상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일반 노동자의 성과 배분 요구에는 ‘과도한 임금 인상 요구’라는 비난이 돌아온다. 백범의 일화는 ‘오래된 지금의 얘기’다.

상놈의 낙원은 오지 않았다네

양반계급사회는 오래전에 몰락했고, 지금은 ‘자유로운 경제주체들이 자유로이 거래하는’ 시장경제다. 백범이 살아온다면 여기에서 ‘상놈의 낙원’을 찾았을까, 아니면 혈기왕성한 그가 또 다른 윤씨를 만나 핏대 세우며 한바탕 난리를 피웠을까? 지난 한 해 동안 청소하고 음식 준비하고 안전 살펴주고 건설하는 이들의 임금이 삭감됐다는 발표를 듣고 새삼 궁금해졌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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