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이후 소득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서민층 소득은 매년 주는 추세다. 지난 2월 한 노숙자가 프랑스 파리 중심부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REUTERS
바야흐로 불평등에 대한 말이 넘치는 시대다. 지난해 토마 피케티의 이 마치 태풍처럼 지나가고 난 뒤, 소득불평등에 대한 연구가 경쟁적으로 쏟아져나왔다. 올봄에는 마치 불모지에서 봄꽃이 만발하는 것처럼 예기치 않은 곳에서조차 연구 결과가 경쟁적으로 발표됐다. 그야말로 백화쟁명의 시대다.
올해 첫 씨앗은 ‘불평등 연구의 할아버지’라 불릴 만한 앤서니 앳킨슨이 뿌렸다. 그는 추위가 사라질 무렵에, 라는 도발적 제목을 붙인 책을 출간했다. 피케티의 이 마르크스 흉내를 낸 것이라면(그는 강력하게 부정했다), 앳킨슨은 레닌의 를 흉내 냈다(그는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수십 년 동안 그의 머릿속에 퇴적돼온 수많은 정책 제안을 책 한 권에 담아두려 했다. 그의 건조하고 때로는 지루한 문체 탓인지 반향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정책을 통해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는 노학자의 낙관적 신념에는 모두 경의를 표했다.
무엇이든 해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들앳킨슨이 영국에 기반한 “일국적 관점”을 제시했다고 하면, 프랑스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프랑수아 부르기뇽은 세계화에 초점을 두었다. 불평등 증대라는 보편적 현상의 배후에는 세계화라는 보편적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2년 프랑스어로 나온 책이지만, 올봄에 영어판으로 다시 출간됐다. 혹 그의 책이 세계화 숙명론으로 오해받을 것을 경계하여, 그는 세계화의 막강한 힘은 인정하면서도 일국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고 결론 냈다. 무엇이든 해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읽힌다.
봄의 절정인 5월은 바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번영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보고서를 통해 불평등 해소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루스벨트연구소에서 의뢰한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불평등 해소책을 낸 대통령이 바로 루스벨트다. 마치 루스벨트의 업적을 복원하려는 듯한 이 보고서는 에둘러 가는 법 없이 명징한 결론을 내었다. 조세제도를 바로잡아 재정수입을 늘리고 이를 기초로 사회보장을 비롯한 정책을 통해 재분배를 강화하자고 했다. 새로울 것 없지만, 불평등을 줄이자는 목소리에 힘을 보태었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곳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다. 세계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도 곧 뒤를 이었다. 2007년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직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불평등 문제에 대해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1990년대 불평등 해소 정책은 경제성장을 인위적으로 저해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이 국제기구들이 이제는 일제히 “불평등은 비생산적·비경제적”이고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줄일 수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부에서 더러 어깃장 내는 목소리가 아직 나오지만, 불평등을 경계하는 소리는 예전보다 커지고 탄탄해졌다. 놀라운 반전이고, 시쳇말로 ‘사건’이었다. 이는 앵글로색슨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불평등 문제를 세계화하는 데 한몫했다.
‘사건’은 여름내 계속됐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그동안 정책적 색채를 달리해온 국제기구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어 만들어낸 보고서다. 주요 20개국(G20) 회의는 올해 초부터 불평등을 본격적으로 다뤄왔는데, 이런 논의를 돕고자 분석 보고서를 마련했다. 국제노동기구(ILO), IMF, OECD, 세계은행이 모두 참여했다. 전례가 드문 일이었고, 과연 이 네 기구가 동의할 만한 보고서가 나올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됐다.
지난 2월10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장 회의 참석자들이 경제 및 금융 구조 개혁에 대한 논의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연합뉴스
노동시장의 일차적 소득분배 바로잡아야
공동보고서가 9월4일에 발표됐다. 제목은 ‘G20 국가들의 소득불평등과 노동소득분배율: 추세, 영향 그리고 원인’(Income Inequality and Labour Income Shares in G20 Countries: Trends, impacts and causes). 우선 사실 확인부터 했다. 과연 소득불평등은 증가했는가? 불평등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따져보았다.
첫째는 총소득이 자본과 노동에 분배되는 비율인데, 흔히 경제학에서는 ‘기능적 소득분배’라 한다. 노동이 가져가는 몫을 노동소득분배율이라 한다. 기본적으로 거시적 현상이다. 둘째는 총소득이 각 개인이나 가계에 분배되는 방식이다. 흔히 지니계수라는 것을 통해 측정되는데, 최근에는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을 비교하기도 한다. 보통 소득불평등이라고 하면 이러한 개인적 소득분배에 초점을 둔다.
이 두 가지 소득분배 형태를 동시에 살피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보고서에 따르면, 지니계수와 같은 개인적 소득분배가 불평등하게 바뀌게 된 이면에는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이 자리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인데, 흥미롭게도 정반대의 추세를 보인 나라들도 있다. 최근 20여 년 동안 적극적 정책 개입을 통해 소득불평등을 줄여온 남미 국가에서는 노동소득분배율이 꾸준히 개선돼왔다.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하면, 이렇게 커진 자본의 몫은 일반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함의는 적지 않다. 소득불평등도를 줄이고자 한다면, 재분배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노동시장에서 이뤄지는 일차적 분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노동소득분배율 개선이 주요한 선결 과제가 된다. 그런데 노동소득분배율이란 기본적으로 임금과 노동생산성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생산성 상승에 맞춰 임금이 비례적으로 올라가면, 노동소득분배율은 일반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간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한 것은 임금이 노동생산성 격차를 따라잡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따라서 이 격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 정책 과제가 된다. 노동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노동-자본 간 분배가 비틀어지면 이를 교정하는 일은 재분배 정책에 고스란히 넘어간다. 마땅히 재분배가 있어야 하겠지만, 노동시장이 해야 할 일까지 떠맡으면 재분배 부담이 커지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이처럼 두 측면에서 소득분배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악화돼왔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핏대를 세울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소득분배는 사회적·정치적 문제로만 간주됐다. 정부의 경제부처나 경제 관련 국제기구들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공동보고서에서는 불평등이 경제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선언했다. 우선 국가 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은 소비 억제를 초래한다. 물론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으로 자본소득이 늘었으니 이에 따라 투자가 늘어났으리라 기대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본소득의 몫은 커졌지만, 그래서 투자에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늘었으나, 투자는 실제 그다지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에 대응한 투자 증가 효과가 전무했다. 이렇게 되면 총수요 부족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고 경제성장률이나 안정성이 떨어진다. 일부 국가는 이를 순수출(수출-수입)을 늘려서 해결했지만, 이 방식을 모든 국가가 사용할 수는 없다. 순수출을 늘려서 ‘면피’한 국가도 사실상 다른 나라의 순수입 확대라는 ‘희생’을 필요로 하니, 어떤 면에서는 국제적 ‘민폐’라고 할 수 있다. 전 지구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식일 수는 없다.
개인적 소득분배 문제에서는 특히 OECD와 IMF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OECD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에 생긴 소득불평등 증대로 약 4.7%포인트에 달하는 성장률(누적성장률) 손실이 있었다고 한다. IMF는 좀더 구체적으로 따졌다. 상위 20%의 소득 몫이 증가하면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하위 20%의 소득 몫이 증가하면 반대로 경제성장률이 증가한다고 밝혔다. 상위 소득자에 대한 누진적 조세정책과 하위 소득자에 대한 적극적 재분배 정책이 사회정의와 정치 안정까지 드높이는 ‘좋은 경제학’이라는 의미다.
여기에 장기적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소득불평등은 자녀의 교육불평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설령 공공교육을 통해 같은 교육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교육성취도는 더 불평등해질 위험이 높다. 그 결과 사회적 이동성은 줄어들고, 사회적·경제적 상승 기회는 점점 더 일부 계층에 국한된다. 그 효과를 꼼꼼하게 수치로 확인했다.
그렇다면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손실만 초래하는 불평등은 도대체 왜 증가했는가?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만 효과적인 정책 수립이 가능하다. 우선 어떤 요인들이 있느냐에는 제법 광범위한 동의가 있다. 세계화, 금융화, 기술 발전, 경제구조(산업구조), 노동시장제도, 생산물 시장 및 경쟁 구조 등은 국제기구들이 공히 뽑는 요인들이다. 즉, 메뉴에는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이 각 요인들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국제기구나 정부의 의견이 미묘하게 갈라진다. OECD는 기술 발전이나 산업구조에 비중을 두고, IMF는 여기에 덧붙여 금융화에 무게를 두며, ILO는 금융화와 노동시장을 강조한다. 기술적 요인을 강조하는 쪽에선 교육과 숙련에 대한 투자가 우선순위가 된다. 노동시장을 강조하는 쪽은 최저임금, 임금협상제도, 임금불평등, 비정규직 문제 등에 주목한다.
조세정책이나 사회보장 정책에 대해서는 그 필요성에 모두 공감하지만, 세부적 사항으로 들어가면 의견이 다시 갈린다. 특히 법인세 인상에 대해서는 꽤 날선 대립이 있는 편이고, 일부에서는 부가가치세 인상을 주장해서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결국 공동보고서는 정책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정치적이면서도 기술적인 침묵이다. 정책의 몫은 G20 국가에 있다. 이번 G20 노동장관 회의에서는 정책 메뉴에 대해 합의하고 이를 공동선언문에 담았다. 11월에 열리는 정상회담 선언문에 어떤 정책 메시지를 담을지 두고 볼 일이다. 그들이 ‘불평등 시대’를 인정하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할지, 아니면 다시 모르쇠로 돌아갈지, 지켜볼 일이다.
낙관의 힘마저 포기할 용기가 없다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봄에 피어나 여름에는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서로 까칠하게 대하는 국제기구들도 모처럼 의견을 모았다. 불평등을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점에 공감했다. 적지 않은 성과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말의 성찬이다. 세상의 일을 말로 꽃피우기는 쉽지만, 그렇게 피는 꽃은 어이없을 만큼 빨리 진다. 이번 가을에는 제대로 여물어 변화의 행동과 힘으로 결실을 맺기 바란다. 크게 낙관하지는 않지만, 낙관의 힘마저 포기할 용기는 아직 내게 없다. 노구의 앳킨슨마저 결연하게 지켜낸 낙관을 젊은 내가 어이 버릴 것인가.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2014년 6월부터 고정칼럼 ‘이상헌의 理想한 경제학’을 연재해온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가 한국을 방문합니다. 그동안 칼럼을 즐겨 읽어주셨던 독자 분들이 직접 필자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에서 마련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링크를 확인해주세요.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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