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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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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이 통하는 로마에서 길을 잃다

G20 정상회담 준비 위해 경제정책 틀 논의한 실무자 회의 참가 출장 보고서… 세계경제 침체 지속으로 노동시장 유연화 등 전제한 구조개혁 주장하던 이들은 길을 잃고
등록 2015-06-12 00:14 수정 2020-05-03 04:28

봄은 왔으나 이번에도 봄 같지 아니하다고 하는 봄날에, 문득 봄 같은 봄날이 언제였는지 궁금해하며 하릴없이 머리 긁적이던 비 오는 어느 날, 필자는 3박4일 일정의 로마 출장 지시를 받았다. 그 지시에 사족을 달 수 없는 궁박한 월급쟁이 처지임을 10초간 한탄하고 “또?”라며 토끼 눈처럼 동그래질 아내의 눈을 10.5초 정도 상상한 뒤, 즉시 준비를 마치고 출장을 다녀왔다. 이에 다음과 같이 출장보고서를 제출한다.

2014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모인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부터). REUTERS

2014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모인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부터). REUTERS

세계경제 우등생(?)들의 회의 1. 한 문장 요약: 나의 출장은 무사하였으나, 로마 회의는 안녕하지 못했다 2. 출장 목적: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주요 20개국(G20) 회의는 이름처럼 대단히 ‘주요’하다. 세계경제라는 것도 본디 고등학교 3학년의 살벌한 풍경과 다를 바가 없는지라, 적어도 20등 안에는 들어야 우등반에 편입되어 섬세한 ‘지도 편달’과 ‘특별 대우’를 받는다. 필자는 잠시 이를 각박하다고 느꼈으나, 환율이 쥐꼬리만큼 바뀌었다고 멱살잡이도 서슴지 않는 쫀쫀한 경제 전쟁터에서 이런 감성적 접근은 용인되지 않음을 이내 깨달았다. 이번 회의는 올해 11월에 열릴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실무자 회의로서 경제 관련 분야의 전반적인 정책 틀을 논의할 계획이었다. 특히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에서 열리므로, 모든 나라들이 온정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마음을 열고 통할 것으로 기대했다. 매일같이 사건·사고가 터지는 ‘춘래불사춘’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정부는 회의장 선정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고색창연하고 엄숙한 회의장 천장에는 파란 하늘이 열려 있었고 천사들이 인간의 불순한 언어를 평화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평화의 기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그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도 천장 벽화를 쳐다보질 않았다.

3. 출장 비용: 공짜를 조심하라

우리 기관이 최근 겪고 있는 재정적 어려움을 곧 나의 어려움이라 믿고, 출장 기간 동안 한 푼의 낭비나 오용이 없었음을 밝혀둔다. 하지만 몇 가지 정산 사유가 있다. 우선 이탈리아 재무부가 커피 및 점심 샌드위치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음식은 대체적으로 후한 편이었으나, 점심시간은 40분 남짓으로 박했고, 앉을 자리도 전혀 없어서 복도에 서서 먹어야 했다. 공짜 점심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은 왜 항상 점심을 먹고 난 뒤에야 생각나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공짜 점심 두 끼는 일비에서 공제 조치해주기 바란다.

공짜 여행도 있었다. 첫날 회의 뒤 주최 쪽이 로마에 처음 오는 ‘촌놈’들을 어여삐 여겨 콜로세움으로 모든 참가자를 초대했다. 혹 이런 자유시간에 ‘은밀하고도 결정적인’ 소곤거림이 나올 것을 염려해 ‘촌놈이 절대 아닌’ 본인도 참여했다. 100여 명에 이르는 각국 대표자들이 한 줄로 서서 보도를 따라 행진하다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공짜표 한 장씩 받아들고 콜로세움으로 이동하는 장관이 연출됐다. 서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시청광장으로 몰래 진입하는 시위대로 오인될 위험이 있을 것이다. 콜로세움에 이미 수천 번은 와보았을 관광 가이드가 ‘촌놈’들보다 더 흥분하는 바람에, 한번 둘러보는 데 무려 2시간이 걸렸다. 그의 설명은 마치 산상 기도처럼 장엄했으나, 그는 질문 없는 ‘주요 20 관광객’에게 실망하고 의기소침해졌다. 양복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세계의 유적을 돌아다니는 진풍경을 보고 관광객들은 ‘격려’의 말과 눈빛을 아끼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모두 지쳐서 숙소로 돌아가는 방법을 묻자, 주최 쪽은 지하철 표도 주질 않고 알아서 가라고 했다. 공짜 여행도 조심해야 했으나, 이 모든 것이 내 부덕의 소치다.

영양분 줄여 경제 체질 개선? 4. 배경: 구조개혁의 마술을 믿다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아는 사람만 알지만, 2014년 내내 G20은 세계경제를 성장시킬 방안을 고민했다. 2014년 11월에는 정상들이 그 결과를 알뜰하게 모아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향후 5년간 추가 2% 성장을 달성하겠다고 만방에 고하고 약속했다. ‘속 빈 강정’이라는 비난을 우려한바, 각국은 ‘성장 전략’이라는 것을 채택했고 거기에 담긴 정책 수는 무려 1천 개가 넘었다. 지도자들은 자축하는 의미에서 모두 코알라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정책의 대부분은 흔히 ‘구조개혁’(Structural Reforms)이라고 불리는 정책이다. 단기적 경기 변화에 대처하는 통화 및 재정 정책과는 달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소해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이 구조개혁 정책이라고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빈혈로 쓰러져가는 환자에게 필요 영양분만 제공하지 말고 빈혈을 이길 수 있도록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해주자는 취지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무작정 반대하기도 힘들지만, 구조개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체질 개선을 위해 영양분 공급도 줄여야 한다고 한다. 예컨대 연금과 실업연금을 깎고 해고의 자유를 높이면서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면, 당장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으나 ‘경제’라는 몸덩어리는 튼튼해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개혁책은 대부분 자유화와 규제완화다. 2014년에 이처럼 큰 약속이 있었으니, 2015년엔 구조개혁의 마술이 얼마나 현란하게 펼쳐질지를 살펴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논리적이긴 하다.

5. 구조개혁: 마술인가, 헛발질인가

당연하게도 회의는 최근 경기 동향과 전망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경기 분석은 ‘사실만을 말하는 사나이’(I’M the Fact·IMF) 담당이다. 이 사나이의 활약은 2014년부터 실로 대단했다. 2013년 가을 이 사나이는 2014년부터 세계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에 들어서면서 성장률이 2014년엔 3.7%, 2015년에는 4%에 육박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어찌해서 이런 숫자가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이에 고무된 G20은 ‘말 많고 탈 많은’ 케인지언적 팽창정책을 서서히 정리하고 평소 눈여겨보았던 구조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사실만 말하지만’ 눈치도 빠른 이 사나이는 재빨리 구조개혁의 깃발을 올렸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오예스맨’(Oh, Easy to Change as Demanded·OECD)이 거들고 나섰다. 늘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니던 ‘구조개혁 정책 리스트’를 서부의 총잡이보다 빨리 끄집어냈다. 물론 불안감이 없진 않았다. 구조개혁에 힘을 모아가고 있던 2014년 4월에 나온 경제 전망 수치는 조금 나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고 2014년 하반기부터 좋아진다고 했다. 더 나아가 구조개혁 정책으로 힘을 모으면 향후 5년간 2%는 추가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것이라 믿자고 합의했다.

IMF 말을 믿기로 합의하다 [%%IMAGE2%%]

그런데 이번 회의에서는 ‘사실의 사나이’가 이상했다. 지난 4월 발표된 2015년 경제성장률 예측치는 충격적이었다. 3.5%가 되지 않았다. 불과 1년 전에 발표된 예측치보다 0.5% 이상 줄어들었다. 장밋빛 같았던 2015년이 어느 순간 2014년만큼 어두운 해가 된다는 뜻이었고, 회의장에도 어둠이 깔렸다. 사나이도 당황했는지 마이크에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우리가 왕창 틀렸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들은 사람도 있고 못 들은 사람도 있었으나 회의장은 술렁거렸다. 지난 몇 년간 떠돌던 우스개 소문이 있었다 한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저명한 경제학 교수가 ‘사실의 사나이’가 사용하는 경제예측 모델에는 한 가지 일관된 것이 있는데 바로 ‘일관되게 틀린다’는 점이라고 했다고 한다. 내 옆자리에 앉은 이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회의 참석자들의 계산이 복잡해졌다. 2014년 상당수의 국가들은 연금 축소나 실업보험 축소 등과 같은 구조개혁들이 단기적으로 경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험을 알았고, 구조개혁에 따른 정치적 위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2015년부터 경기회복 전망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구조개혁 정책에 선뜻 동의했다. 즉, 빈혈 환자에게 기본적인 영양 공급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 대전제가 무너지자 많이 곤란해졌다. 당장 자신의 상관인 경제장관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가 걱정이고, 그 장관이 대통령이나 총리에게 보고할 일이 막막해졌다. G20 지도자들이 포부도 당당하게 ‘2% 추가 성장’이라고 선언한 지 불과 1년이 지나 경제가 지난해보다 좋지 않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경제 관료들이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6. 대안 모색: 길을 잃고 소리 높이다

은 사라졌다. 계산에 영민한 참석자들은 추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일하는 이들의 소득은 늘지 않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받는 실업급여도 줄고 퇴직한 이들의 연금도 줄어들어 가계소득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태이고, 그 결과 소비가 정체됨으로써 투자와 수출입이 힘들어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확장적 재정정책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미리 손발을 맞추었는지, ‘사실의 사나이’와 ‘오예스맨’은 재정정책이 성장에도 좋고 불평등도 줄인다는 연구 결과까지 발표했다. 정부 부채가 마치 인류의 원죄인 양 다룬 것이 불과 몇 년 전 일인데, 이제 재정정책도 잘 사용하면 쓸 만한 정책이라고 했다. 상전벽해가 달리 없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책임 방기’에 해당된다는 협박도 나왔고, ‘몸무게를 잃어서 걱정이라면 뭐라도 먹게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비유까지 등장했다. 구조개혁을 통한 ‘체질 개선’은 그 뒤의 일이라고 했다. 빈혈 환자의 체질을 개선하려다가 환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 했다.

날선 반대도 나왔다. 구조개혁은 그 효과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1년도 되지 않아 이를 없던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심지어 구조개혁이 벌써 효과를 내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갑작스러운 논쟁에 어쩌지 못하는 나라도 적지 않았고, ‘빈혈환자 긴급구조론자’의 반격이 곧바로 시작됐다. 구조개혁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기다려보자는 얘기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자신의 장관이나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협박도 나왔다. 구조개혁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라 이와 병행해서 수요 진작 정책을 써보자는 읍소 작전도 동원됐다.

휴식시간도 건너뛰며 계속된 공방은 허기를 이기지는 못했다. 다시 논의해보자는 약속만 남긴 채, 점심 휴식을 가졌다. 하지만 점심 식사 뒤에는 아무도 재론하지 않았다. 갑론을박은 회의장에 두고 나왔다. 회의장의 천장 벽화에 있는 천사들이 뒷마무리를 한다고 누군가 쑥덕거렸다.

회의장에 두고 나온 갑론을박7. 향후 전망: 서울로 가는 길

구조개혁을 구조하기 위한 마지막 실무 회의는 9월에 열릴 예정이다. 가을빛 완연한 계절에 서울에서 열린다. 봄 같지 않은 날에 길을 잃었으니 더운 여름날에는 와신상담하여 다시 가을에 만나서 인고의 열매를 맺기 기대한다. 한번 잃은 길이 쉽게 찾아지지는 않겠으나 그들의 방황은 서민들에게 크나큰 고통이므로 진정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경제모델이 몇 초 만에 만들어내는 마술에서 벗어나 길거리에 쌓여가는 땀의 수를 들여다보는 것이 방황을 끝내는 첫걸음이겠다는 개인적 소견도 덧붙인다. 이를 확인하고자 ‘수고스러운’ 서울 출장을 자청하니 나의 용단을 높이 사서 승인해주길 바라 마지않는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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