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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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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불러낸 11월의 여인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초청받은 역사상 가장 연륜이 깊은 ‘아이돌 스타’ 프란치스코 교황… 가톨릭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회 활동가’ 도러시 데이 호명해 수행한 자기비판
등록 2015-10-08 11:48 수정 2020-05-02 19:28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9월24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9월24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의 가을은 아름답다. 하늘이 높아지고 단풍 깊어가는 날에는, 빈틈없이 움직이는 득표 계산기를 들고 진흙탕 싸움도 불사하는 살벌한 워싱턴을 잠시 잊어도 좋다. 그런 날에 ‘가장 비정치적이어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초대받았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연륜이 깊은 ‘아이돌 스타’인 그가 가을 메시지를 들고 나타났다. 팔순의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나이 들어가는 나는 이미 나이 든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며 그의 연설을 꼼꼼히 챙겨듣는다.

이제 팔근육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미국 의회는 여전히 힘이 세다. 그곳에서 연설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자,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것처럼 입을 바싹 마르게 하는 일이다. “그래, 왔어. 얘기 한번 해봐” 하는 식이다. 간간이 박수가 쏟아지지만, 그것은 연설하는 자에게 보내는 격려이자 자신들의 관대한 우월성을 확인하는 의례다.

하지만 교황이 나타나자 의원들은 긴장했다. 팔순의 노인은 여유로웠고, 나름 산전수전 겪은 의원들은 귀를 세웠다. 느릿느릿하나 유려한 영어로 프란치스코는 순식간에 의사당을 사로잡았다. 쏟아지는 박수에 그는 ‘아이돌 스타’답지 않게 어색해했다. 그는 박수의 정치학을 익히 알고 있다.

“이민자의 꿈 위해 싸운 역사가 미국의 역사”

프란치스코는 연설이 아니라 대화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대화법은 노련하고 치밀했다. 미국의 자유와 번영을 이룬 치열한 역사를 불러내고, 세상 곳곳에서 그런 싸움을 힘겹게 벌이는 이들을 지원하자고 했다. 시리아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여러분은 이민자의 자손”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들이 곧 우리이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이민자의 꿈’을 위해 싸운 역사가 곧 미국의 역사라고 했다. 그들의 역사를 불러내 그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이민자의 자손인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는 것이다. 백전의 노장다운 솜씨였다.

교황은 ‘역사 속 인물들’도 불러냈다. 그가 말하는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의도였다. 이를 통해 미국의 역사와 대화하고 심지어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가 불러낸 인물은 네 명이다. 첫째는 노예를 포함한 모든 이의 자유를 지켜낸 링컨 대통령. 둘째는 모든 이들이 ‘완전한 권리’를 꿈꿀 수 있게 한 마틴 루서 킹 목사. 셋째는 저명한 가톨릭 저자로서 종교 간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한 토머스 머튼. 각각 자유, 평등 그리고 종교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놀라는 이는 없었다. 예상 가능한 인물들이었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영웅’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호명한 나머지 한 인물은 낯설고도 문제적인 인물이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상당수 의원들은 자신의 무지에 당황했을 터다.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은 교황의 ‘도발’에 경악했다. 아마도 그녀의 이름을 듣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을 의원은 단 한 명이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파죽지세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버니 샌더스. 다시 한번, 교황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 또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인물이다. 그가 그녀를 불러냈고, 나는 망각의 세월을 메우기 위해 부산하게 검색을 시작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노동 착취·차별 고발
교황은 미국 의회 연설에서 링컨 대통령, 마틴 루서 킹 목사, 저명한 가톨릭 저자인 토머스 머튼 그리고 1930년대 가톨릭 노동운동을 이끈 여성 활동가인 도러시 데이를 언급했다.  AP 연합뉴스

교황은 미국 의회 연설에서 링컨 대통령, 마틴 루서 킹 목사, 저명한 가톨릭 저자인 토머스 머튼 그리고 1930년대 가톨릭 노동운동을 이끈 여성 활동가인 도러시 데이를 언급했다. AP 연합뉴스

그러면 도러시 데이는 누구인가? 20세기를 몇 년 앞두고 태어난 그녀는 젊은 시절 다소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낮은 곳으로 향하며 깊어졌다. 10대 후반부터 사상적 고민이 깊었다. 사회주의·무정부주의·조합주의 등등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한때 ‘세계산업노동자’(IWW)라는 전투적 조합주의 단체에 경도되었다. ‘세계산업노동자’는 바로 헬렌 켈러가 관여한 단체였고, 이 때문에 헬렌은 ‘빨갱이’ 멍에를 평생 짊어지게 된다. 그녀의 이름이 사라진 것도 그때였다. 그렇게 헬렌이 역사의 뒤편으로 잊혀질 때, 도러시 데이는 가톨릭에 귀의하며 사회적 활동가로 변신한다.

곧 역사적 만남이 뒤따랐다. 도러시는 페테르 모랭이라는 프랑스인을 만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불법이민자였으나,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적 정의에 대해 헌신적이었고, 무엇보다 배운 자보다 똑똑했다. 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핍박받는 자를 위한 조직적 활동을 전개한다. 라는 신문을 내어 노동 착취와 차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발했다. 어려워 절망하는 삶을 일으키기 위해 도시와 농촌에 공동체를 만든다. 빈곤은 ‘어쩔 수 없는 사회질서의 일부’라는 사회적 편견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가톨릭 내에 만연한 숙명주의·근본주의와 불화한다. 공산주의와 날선 논쟁도 불사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전쟁주의와 폭력주의를 경계했다. 전쟁과 폭력이 핍박받는 자를 위해 해준 것은 없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가장 참혹하게 뺏어갔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과 히로시마 폭격은 인간의 헛된 우상이 빚어낸 비극이었고, 그녀는 그런 우상과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녀는 당대의 지배적 사상들과 그 속에서 배태된 정치세력들에서 외로운 섬처럼 살아갔다. 그럴수록 그녀의 미연방수사국(FBI) 비밀파일은 두꺼워졌다. 당시 무소불위의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그녀를 선동죄로 기소하려 했다.

“주교는 우리의 통치자는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도러시 데이를 역사의 ‘그늘’에서 불러올린 것은 지금의 사회상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미국 가톨릭계에는 한없이 불편한 존재인 도러시를 21세기의 오늘로 초대함으로써 가톨릭에 대한 참담한 자기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940년대 말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 뉴욕의 가톨릭 묘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뉴욕 주교였던 프랜시스 스펠먼은 파업 노동자들을 ‘공산주의 음모’에 휘둘린 자로 몰아갔다. 어떤 협상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도러시 데이는 노동자들을 격렬하게 옹호했다.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엄하다는 가톨릭 믿음을 주교가 깡그리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주교는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일지 모르나, 우리의 통치자는 아니다”라고 그녀는 쏘아붙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 싸움에서 졌다. 그녀의 입지는 세속의 세계에서도 영적인 세계에서도 고립돼갔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가톨릭과 불화한 첫 번째 사례일 뿐이다. 베트남전쟁이 나자, 그녀는 즉각 평화주의의 이름으로, 그리고 가톨릭의 이름으로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 가톨릭계의 주류적 정서는 이와 달랐다. 스펠먼 주교는 베트남을 방문해 미국 장병들을 위로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문명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그녀의 독해진 입을 피해갈 수 없는 사건이었다. 스펠먼 주교의 가장 정치적인 발언에 그녀는 가장 가톨릭적인 해답을 내놓았다. 전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비참함뿐이라고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날카로워질수록 그녀를 멀리하는 이는 늘어났다. 수군거림도 커졌다. “도러시는 임신중절도 하고, 딸 하나를 두고도 이혼한 독한 여자라니까.” 한마디로 그녀는 가톨릭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가톨릭 노동자 운동에 속한 이들은 이제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쫄지 않았고, 그녀의 답은 항상 명쾌했다. “고백건대, 우리는 어리석다. 그리고 우리가 좀더 어리석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는 이들보다는 자신이 더 가톨릭적이라 믿었다.

11월에 태어나 83년 살고 11월에 세상 떠나

교황은 그녀를 불러냈고, 그녀는 다시 우리 곁으로, 그녀가 믿었던 가톨릭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곧 미국 역사의 상처이자 가톨릭의 아픔이다. 그 아픔을 응시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오늘날 우리가 회피하려는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한다. 동정과 자선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의 뿌리를 보라고 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저명한 정치인을 만나기보다는 뉴욕의 할렘을 찾았다. 집 없는 이들을 찾았고, 마음 한 조각과 양식 한 톨을 나누었다. 도러시 데이는 뉴욕에서 태어났고, 뉴욕의 차가운 곳에서 가톨릭적 구원을 찾았다. 구원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구하고자 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도러시를 다시 만났다.

도러시는 11월의 여인이다. 그녀가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은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그해에, 그녀는 11월의 차가운 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백악관 앞에서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인다. 체포와 구금이 뒤따랐다. 감옥에 갇힌 15일 내내 단식투쟁을 했다. 그 뒤로는 단식을 밥 먹듯이 했다. 또 그녀는 11월에 태어나 꼭 83년을 살고 11월 말에 세상을 떠났다. 아름다운 가을이 끝나는 11월에는 그녀를 위해 늦은 기도라도 해야겠다. 내 마땅히 빵 한 조각과 와인 한 잔 올리리라.

이상헌 경제학 박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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