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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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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감동’을 번역하다

<별 그대> 등 국내 드라마 번역 선두주자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
‘청각을 시각화’하며 세계 시청자 ‘오감’을 건드리라
등록 2014-03-08 15:07 수정 2020-05-03 04:27
지난 2월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위치한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의 김창희 PD가 편집실에서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2월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위치한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의 김창희 PD가 편집실에서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천송이가 말한다. “그러니깐 남들 3개월, 1년, 2년에 다 할 거 그쪽 말대로 우리 한 달 안에 다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나면 한 달도 안 돼서 나 그쪽이 질릴지도 몰라. 내가 원래 그런 애라니깐! 도민준, 도민준씨…. 내가 잘 잊을 수 있게 미련이 없게 잘 잊을 수 있게… 도와줘.” 옆집에서 초능력으로 그녀의 얘길 듣고 있던 도민준이 울먹인다. “그래 그런데…, 나는 널 어떻게 잊지?”

SBS 드라마 (이하 ) 17화의 대사. 오열하는 도민준(김수현)을 보자니 주책맞게도 눈이 맵다. 옆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곱을 떼는 척하며 끝. 나처럼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에 눈시울을 붉힐 시청자는 한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가 최근 수출용으로 번역되고 있는 까닭이다. 의 영어·중국어·일어 번역과 홍보 동영상·리플릿의 제작을 맡은 (주)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freefilm.co.kr)의 신경주(43) 대표는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해외 판권 계약이 성사된 지도 오래됐다”며 “드라마 수출국도 기존 아시아 위주에서 전세계로 다양화됐다”고 말했다. 정확하면서도 현지 친화적인 영상 번역으로 이름을 얻은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는 원스톱 영상 전문 솔루션 업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들리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다</font></font>

사실 어찌 보면 해외 콘텐츠를 한국어로 옮기거나, 국내 콘텐츠를 영어 등의 다국적어로 옮기는 영상번역은 감동의 전달을 넘어 새로운 감동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자막이나 더빙이 없다면 들어온 것이든 나가는 것이든 콘텐츠는 온전히 공감될 수 없는 까닭이다. 결국 ‘청각의 시각화’라고 할 만한 영상번역을 통해 <csi>는 한국에서 ‘미드(미국 드라마)의 부활’을 열 수 있었고, 은 100여 개국 30억 명의 시선을 붙잡으며 ‘한류의 르네상스’를 만들 수 있었다.
지난 2월18일 찾은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는 업계 1위의 땀과 노력으로 적막(?)하되 분주했다. 그 적막함은 사무실의 구조에서 흘러나왔다. 고시원처럼 독립적인 방으로 분획된 사무실에서 번역가들은 개별적으로 번역을 한다. “다른 업체를 가면 파티션으로 구분해놓은 곳도 있어요. 그러면 이어폰을 끼고 작업해야 하는데, 몇 년씩 하루 종일 그렇게 일하면 아무래도 청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요. 그래서 방 구조로 사무실을 만들었죠. 업무에 집중하는 데도 그게 도움이 될 테고요.” 18년차 전문 번역가로 그 자신이 청력과 시력이 안 좋아진 ‘산재’를 앓고 있다는 신 대표의 말이다.
한편 분주함은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만의 꼼꼼함에서 비롯됐다. 영상번역을 한 지 5년차인 박지윤(31)씨는 “영화나 미드 같은 경우는 덜 힘든데, 다큐멘터리가 걸리면 힘이 갑절로 든다”며 “얼마 전에는 의 의학 다큐를 번역했는데 용어 자체가 전문적이어서 사전을 끼고 거의 공부하다시피 번역을 했다”고 웃었다. 고되게 번역을 마친다고 해서 작업이 끝난 건 아니다. 전문 분야의 경우, 해당 전문가에게 번역 감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큐가 아닌 미드는 좀 편할까. “지금이야 대중적인 작품이 되었지만 처음 <csi> 시즌1을 번역할 때는 해부학과 법의학 용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어요. 지금도 시리즈 같은 경우는 의학용어가 하도 많이 나와서 밑에 일일이 주를 달아줘야 하거든요. 시트콤은 좀 쉬우냐면 그렇지도 않아요. 같은 경우 은어와 유행어 등 트렌디한 단어가 많아서 그 맥락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번역할 수 없거든요. 말하고 보니 죄다 어려운 것들뿐이네요. (웃음)”

<font size="4"><font color="#008ABD">구글과 한국 영화 번역 독점계약</font></font>

신 대표 다음으로 가장 오랜 경력을 지닌 16년차 최은란(41) 팀장은, 번역일이 감수 외에도 수차례 교열과 검수 등을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라면서도 늙어서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평생 직업’이라고 귀띔했다. 번역의 잘잘못을 따지는 ‘직업병’ 때문에 집에서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만 본다는 그가 가장 신명나게 번역하는 장르는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은 집의 아이들이 좋아해서 더 일할 맛이 나죠. 애니메이션의 더빙 대본 번역을 할 때, 입 모양에 맞는 더빙 대본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영상을 틀어놓고 직접 성우 연기를 하거든요. 목소리를 바꿔가며 주인공과 악당 역할을 하는 엄마를 보고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해하고 재밌어하죠. 하긴 아이들에겐 영상동화구연이 따로 없었을 거예요.” 입 모양에 맞는 더빙을 하는 건 오로지 성우들의 노하우와 노력이라고만 여겼는데, 그 안에는 번역가들의 땀도 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독해보다 영작이 어렵듯 외화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보다, 한국 콘텐츠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 더 어려운 걸까? 사내 유일한 남자 번역가로 한영 번역을 하겠다고 나선 안기덕씨의 말이다. “그렇다고 봐야죠. 외화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건 한국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도 가능하지만, 한국 드라마를 영어로 번역하는 건 외국에서 살다 온 분들이 아무래도 더 잘해요.”
1991년 방송 프로그램 제작으로 시작해 외화와 해외 다큐멘터리의 자막·더빙 번역을 거쳐 한국 영상콘텐츠의 다국어 번역 시스템과 해외 홍보 동영상, 리플릿 제작까지 두루 갖춘 토털 영상 전문 솔루션 업체로 성장한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는,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지난해 구글(유튜브)과 한국 고전영화들을 영어로 번역해 공급하는 독점계약을 맺기도 했다. 올해는 영국 <bbc>와도 콘텐츠 한국어 번역과 더빙, 자막 마스터 제작, 쇼케이스 리플릿 제작과 관련해 계약을 체결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외화 번역에서 한국 영상콘텐츠의 번역 및 홍보로 업무의 중심이 옮겨간 상황에서 신 대표는 밀려드는 일감에 감사하면서도 “회사를 더 키우면 지금의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다”며 일을 물리기도 한다. “한국 영상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 일은 곧 음식 다큐든 드라마나 영화든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대로 번역해 시청자의 오감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콘텐츠를 전세계의 시청자에게 소개하기 위해 영어·중국어·아랍어·프랑스어·일본어·독일어·몽골어·베트남어 등 다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시스템과 인력을 재작년에 마련한 프리필름커뮤니케이션스는 이미 2012년과 2013년 연속으로 한국영상자료원의 의뢰를 받아 한국 영화들의 다국어 자막 DVD 제작을 위한 번역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실 ‘단순한 번역업체를 넘어 드라마나 영상 콘텐츠와 관련된 편집, 홍보 애플리케이션과 동영상, 리플릿 제작 등 영상과 관련한 일체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로 발돋움 중인 이 회사가 안팎에서 두루 인정받는 이유는 의외로 간명하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꾸준히 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원동력은 업계에서 드물게 정규직으로만 회사를 운영하며 높은 급여 지급과 대체휴무제 등 남다른 직원 처우에서 나온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또 다른 한류의 가능성 분만 </font></font>

직원들 사이에서 ‘깨알 잔소리꾼’으로 통하는 신 대표는 직원들의 부모님 생일부터 태블릿PC, 털실내화 등 직원 비품까지 직접 챙길 정도로 오지랖(?)이 넓다. 얼마 전 라식수술을 했는데도 관리를 제대로 안 한다며 직원을 타박하는 사장부터, 사장이 생일선물로 사준 시계를 차고 인증샷을 보내는 막내 직원까지 스스럼없고 편한 회사 분위기도 높은 생산성의 배경이다.
“물론 예전보단 나아졌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번역일에 대한 대우는 낮은 편이거든요. 저희 직원들이 이런 조건에서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번역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봅니다. 사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다큐멘터리를 번역해 해외에 알린다는 점에서 저희는 또 다른 한류 전도사니까요.”
번역가들의 위상이 높아지려면 작가협회의 회원이 되어 자신의 번역물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신 대표는 일정 기간 연차가 쌓인 직원들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이다. 직원들을 종업원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후배로 여기는 대표와, 직원들의 일에 대한 열정이 또 다른 감동을 ‘번역’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bbc></csi></c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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