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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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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하는 아이의 촉감을 듣다

방대하고 상세한 소비자 조사로 신제품 개발하는 유한컴벌리 이노베이션센터…깐깐한 한국 엄마의 의견 반영이 1등 요인
등록 2013-11-02 15:15 수정 2020-05-03 04:27

10월18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유한컴벌리 이노베이션센터.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듯한 남자아기 3명이 엉덩이를 실룩샐룩 흔들며 들어섰다. 엄마 손을 놓더니 한 아기가 한달음에 미끄럼틀로 올라선다. 뒤질세라 다른 아기는 자동차를 잡아탔다. 하지만 마지막 아기는 장난감보다 낯선 어른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 듯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매년 1만 명 넘는 엄마와 아기 만나

이날은 유한킴벌리의 하기스가 아기 체형에 잘 맞는지 직접 테스트하는 날(Fit Study)이다. 아기가 기저귀를 입고 활동하면서 체형에 잘 맞는지, 움직임이 편안한지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수백 명의 아기가 이렇게 이노베이션센터에서 몇 시간 놀다 간다. 유한킴벌리가 엄마와 아기가 놀 수 있는 놀이공간(생활연구소)을 따로 만든 이유다. 생활연구소 입구에는 ‘우리는 고객님의 경험과 의견을 소중히 여깁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유한킴벌리는 매년 1만 명이 넘는 엄마와 아기를 만나 하기스 제품을 평가받는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회사 이노베이션센터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연구원들의 모습.

유한킴벌리는 매년 1만 명이 넘는 엄마와 아기를 만나 하기스 제품을 평가받는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회사 이노베이션센터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연구원들의 모습.

이날 테스트에 참가한 윤나연(31)씨가 두 살 난 이윤찬군의 기저귀를 갈아주자 연구자의 질문이 쏟아졌다. “아이가 서 있을 때 기저귀를 갈기 어려웠나요.” “밴드 길이, 폭이 적당한가요.” “기저귀 안쪽이 보송보송한가요.” “소변이 샜나요.” 윤씨는 1점부터 7점까지 점수를 매기며 신제품을 꼼꼼히 평가했다. 윤찬군이 지루한 듯 칭얼거리자 다른 연구자가 뽀로로 동영상을 보여주며 놀아준다. 윤찬군이 착용한 기저귀는 연구원들이 손으로 한 땀씩 만든 ‘수제품’이다. 윤씨는 “아기의 표정을 보면 새로운 기저귀가 편한지 불편한지 알 수 있다. 이런 테스트가 재밌고 더 나은 기저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 보람 있다”고 말했다. 윤씨는 소비자 패널로서 기저귀를 집에서 배달받아 일정 시간 이상 착용한 뒤 엉덩이와 기저귀 표면의 상태를 일지로 기록하는 일에도 참여하고 있다.

유한킴벌리는 매년 1만 명이 넘는 엄마와 아기를 만나 하기스를 평가받는다. 아기의 민감하고 중요한 신체 부위에 24시간 밀착해 있고 하루 8~10장씩 갈아주다보니 엄마라면 누구나 ‘기저귀 박사’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흡수성, 통기성, 밀착력, 두께, 냄새, 디자인, 밴드 접착력과 늘어나는 정도까지 다양한 요소로 하기스를 분석한다.

하기스(Huggies)는 1983년 유한킴벌리가 출시한 국내 최초의 위생 종이 기저귀다. 하기스란 ‘Hug Babies’, 즉 ‘아기를 껴안다’라는 뜻이다. ‘하하하’ 웃는 아기 얼굴이 떠오르도록 하기스라고 표현했다. 30년 동안 하기스는 국내 기저귀 시장(5천억원)에서 부동의 1위(60%)를 지켜왔다. 김영일 유한킴벌리 홍보팀 차장은 “아기는 태어나 2년 남짓 기저귀를 쓴다. 매년 고객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30년간 1위를 고수하려면 새로운 고객을 만족시키는 변화와 혁신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한킴벌리는 흡수력과 착용감을 향상시킨 울트라슬림 디자인(1993), 순면 감촉 통기성 커버(1996), 아기 활동성을 높여주는 ‘매직벨트’(1997) 등을 잇따라 내놓았다. 2005년 ‘걷기 시작하면 입히세요’라는 광고를 선보인 팬티 기저귀 ‘하기스 매직팬티’와 2008년 자연소재 원료를 강화한 ‘하기스 네이처메이드’를 출시해 기저귀 시장 판도를 바꾸었다.

미국·러시아 등 6개국서 선호도 1등

유한킴벌리 대전공장에는 중국·러시아·오스트레일리아 등 전세계 11개 국기가 나부낀다. 모두 하기스를 수출하는 나라다. 2004년 해외에 진출한 하기스는 2008년 단일 품목으로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지난해 2200억원의 수출액을 올렸다. 특히 중국 프리미엄 기저귀 시장에선 하기스(중국명 하오치)가 10년 연속 점유율 1위(60%)를 고수한다. 세계 1등 브랜드의 치열한 격전장인 중국에서 미국 P&G, 일본 유니참 등 세계적인 생활용품 기업을 제쳤다는 얘기다.

김영일 차장은 “일등 공신은 깐깐한 한국 엄마”라고 말한다. “미국 합작 투자사인 킴벌리클라크가 최근 일회용 기저귀에 대한 미국·러시아 등 6개국 소비자의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에서 제조한 ‘하기스 프리미어’(프로젝트명 피카소)가 1위를 차지했다. 30년 가까이 한국 엄마를 이해하고 시장을 연구해 탄생시킨 제품이다. 킴벌리클라크는 피카소 1세대 제품의 글로벌 표준 플랫폼화를 서두르고 있고 유한킴벌리는 이미 3세대 제품을 출시했다.”

하기스는 미국 킴벌리클라크의 브랜드지만 글로벌 제품과 한국에서 팔리는 제품이 다르다. 한국 하기스는 유한킴벌리가 국내 소비자를 위해 생산한 맞춤형이기 때문이다. 조수용 유한킴벌리 제품개발팀장의 설명이다. “서양 엄마는 엄마가 편한 기저귀를 찾지만 한국 엄마는 아기가 편한 기저귀를 선택한다. 이런 지역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글로벌 기업이라도 국내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기저귀는 말 못하는 아기가 사용하고 구입과 평가는 엄마가 맡아 더욱 세밀한 소비자 조사와 신제품 개발이 필요하다.”

1983년 하기스 출시 이후 국내용 제품은 45번, 수출용 제품은 50번이나 업그레이드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국내용 하기스는 두께가 4~5mm로 다른 국가의 하기스보다 50% 정도 얇다. 해외에서는 쓰지 않는 에어엠보싱이란 소재를 써서 통기성이 좋다. “아기 피부가 쓸린다”는 지적에 기저귀를 고정하는 원터치형 ‘찍찍이’도 3년에 걸쳐 부드러운 것으로 바꿨다. 그 덕분에 세계 점유율 1위인 미국 P&G 팸퍼스가 입성했지만 하기스가 국내에서 성공을 이어가고 있다.

하기스 신제품을 아기가 착용해보고 잘 맞는지 테스트하고 있다.

하기스 신제품을 아기가 착용해보고 잘 맞는지 테스트하고 있다.

신제품 개발은 ‘방대하고 상세한 소비자 조사’에서 출발한다. 소비자 조사의 주제와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제품과 경쟁 제품에 대한 평가, 소비자 인식 및 수요 조사, 시제품 테스트 등 설문조사, 면접조사, 행동관찰 등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2012년 유한킴벌리가 실시한 기저귀 소비자 조사만 50여건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1만3천 명 가까운 소비자와 만났다.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에는 통상 600명의 엄마에게 시제품과 경쟁사 제품을 함께 제공해 둘 다 사용해보도록 했다. 이 조사에 참가하면 300개에 달하는 세세한 문장에 답해야 한다. 또 신제품이 아기 체형에 잘 맞는지 직접 테스트하기 위해 2천명을 이노베이션센터로 초청했다. 심층 인터뷰도 빠지지 않는다. 소비자와 조사원이 2시간가량 기저귀에 관한 심층 대화를 나누는 걸 마케팅 담당자, 연구·개발 연구원, 그리고 디자이너까지 지켜본다. 18년간 소비자 조사를 해온 박미화 유한킴벌리 R&E지원팀 수석부장은 “엄마들이 제품의 장단점을 꼼꼼하고 확실하게 평가해 놀랄 때가 많다”고 했다.

자연 소재 강화한 기저귀 연구 주력

2011년 4월 출시한 피카소가 대표적인 소비자 조사의 산물이다. 과거 유한킴벌리의 소비자 조사를 보면, 한국 엄마들은 기저귀의 흡수력과 새지 않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왔다. 부드러움은 뒷순위였고, 부드러움 중에서도 매끄러운 부드러움을 선호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일본 기저귀를 경험한 뒤 엄마들의 취향이 바뀌었다. 소비자 조사에서 ‘폭신폭신 부드러움’을 선호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유한킴벌리는 하기스 골드를 하기스 프리미어로 교체하면서 에어엠보싱 패턴을 적용했다. 엉덩이와 안감 사이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을 18% 늘렸고 안감을 폭신폭신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소재로 바꾸었다.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해 일본 기저귀 소비가 급감한 대신 하기스 프리미어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오줌 알림 마크도 마찬가지다. 기저귀 교체 시기를 알려주는 기능이 있을 뿐 아니라 디자인도 예쁘기를 소비자는 바랐다. 1년 넘게 연구해 기저귀에 노란색 별을 그려넣어 아기가 오줌을 싸면 색깔이 변하도록 했다. “제품을 공들여 만든 것 같다”는 엄마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조수용 팀장은 “킴벌리클라크 연구소에서 노란색 오줌 알림 잉크를 개발했지만 그걸 기저귀에 적용해 상용화한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 엄마의 바람과 대전공장 사원의 숙련기술이 낳은 성과”라고 말했다.

5년 앞을 내다보며 제품을 연구하는 유한킴벌리 이노베이션센터가 최근 힘을 쏟는 제품은 자연 소재를 강화한 ‘하기스 네이처메이드’다. 현재는 홀로 자연주의 기저귀 시장을 이끌어 전체 기저귀 시장 점유율이 7%에 그치지만 미래는 다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스마트폰이 한순간에 휴대전화 시장을 재편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미래도 엄마와 아기에게 물어야 하겠지만.

용인=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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