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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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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처럼 잘 조율된 차

소음 줄이는 연구에서 나아가 항공기·잠수함에 쓰이는 ANC 등
첨단 기술로 고유 소리 창조하는 현대·기아차 NVH2 리서치랩
등록 2013-10-01 13:12 수정 2020-05-03 04:27
오감이 어우러지는 브랜드를 개발해 차별화에 성공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팅업체 ‘인터브랜드’는 오감 마케팅 사례를 말한다. “코카콜라는 단순히 마시는 음료가 아니다. 소비자가 촉감으로 느끼는 용기 모양의 가치만 해도 최소 4조원이 넘는다.” 소비자는 브랜드를 인식할 때 시각(58%) 이외에 청각(41%)·후각(45%)·촉각(25%)·미각(31%) 등을 활용하지만 기업의 마케팅은 시각(84%)에만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는 반성이 마케팅의 출발점이다. ‘브랜드감각연구소’의 연구를 보면, 한 감각만 사용하면 브랜드 효과가 30% 나타나는 반면 세 감각을 동시에 사용하면 그 효과가 70%로 증대된다. 오감 마케팅에 도전하는 국내 기업도 생겼다. 2013년 3월, 기아자동차가 브랜드의 특성을 표현한 음악 (Advent of the Kians)를 출시한 게 대표적이다. 또 유명 조향사가 기아차 고유의 향기를 담은 방향제와 향수 등의 제품을 개발해 올 하반기에 내놓는다. 미각·촉각까지 영역을 확대해 오감 브랜드를 완성할 계획이다. 는 오감을 접목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선보이려는 국내 기업들의 현장 이야기를 담은 ‘기업과 오감’을 격주로 연재한다. _편집자

노란 불빛 사이로 우산을 든 어른이 지나가고 빨강 장화를 신은 아이가 뛰어다닌다. 비 오는 날, 자동차에서 내다본 풍경이다. 흐르는 화면과 함께 창문과 선루프에 떨어지는, 와이퍼가 닦아내는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비 오는 날엔 시동을 끄고 30초만 늦게 내려볼 것, 태양 아래서만 진가를 발휘하던 선루프의 전혀 다른 매력을 발견할 테니.” 2013년 4월 선보인 쏘나타의 TV 광고 ‘자동차에 감성을 더하다’ 빗방울 편이다. 이 광고의 주인공은 ‘우타음’(빗방울이 차 위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이다. 이 소리는 현대·기아자동차의 소음과 진동을 연구하는 경기도 화성 연구개발본부(남양연구소) NVH2 리서치랩이 디자인했다. 소음ㆍ진동 책임자인 박동철 연구위원은 “어떤 자동차 소리도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시각 다음으로 중요한 청각적 요소

1995년 현대차에 비상이 걸렸다. 새 차를 구입한 미국 소비자 100명 중 20~30명이 주행 중 나는 바람 소리에 불만을 제기했다. “북미 시장에서 퇴출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10년 뒤 주행 중 바람 소리 불만 건수는 일본 도요타와 함께 최하위를 기록한다. 소음원을 찾아내 듣기 싫은 소리를 줄인 소음ㆍ진동 연구 덕분이다. 이제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고유한 특성을 지닌 자동차 소리를 창조하는 데 도전하고 있다.

소음진동(NVH) 시뮬레이션 기기에 앉아 책상 아래 가속 페달을 밟으며 핸들을 움직이면 도로를 달릴 때 느끼는 자동차 소리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NVH 시뮬레이션 기기를 시운전하는 모습.정용일

소음진동(NVH) 시뮬레이션 기기에 앉아 책상 아래 가속 페달을 밟으며 핸들을 움직이면 도로를 달릴 때 느끼는 자동차 소리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NVH 시뮬레이션 기기를 시운전하는 모습.정용일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 하면 언뜻 엔진음이 떠오른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훨씬 다양하다. 달릴 때 타이어가 바닥과 맞닿는 소리, 차량 문을 여닫는 소리, 방향지시등을 작동할 때 나는 소리, 안전띠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 경고하는 소리까지. 자동차의 특성을 파악할 때 소비자는 귀를 기울인다. 가속 엔진음을 듣고 차량이 잘 달린다고 판단하고, 차량의 문을 닫아보며 새 차의 품질을 가늠하는 식이다. 청각은 시각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특성도 지녔다. 2007년 현대차가 오감의 중요도를 조사해보니, 청각적 요소(23.5%)가 시각적 요소(40.4%) 다음으로 중요하게 나타났다.

세계 자동차 업계가 소리 연구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다. 아우디의 독일 잉골슈타트와 네카르줄름 공장에서는 55명의 엔지니어가 기본 소리를 만들어내는 음향디자인을 담당한다. 음향책임자인 토마스 크리겔은 자동차 소리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했다. 차를 설명할 때 ‘오케스트라처럼 잘 조율된 차’ ‘훌륭한 뮤지션’ ‘작곡·지휘의 예술 집합체’라는 표현을 쓴다.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 스포츠 GTS는 차량을 개발할 때 피아니스트와 작곡가의 자문을 받는다. 특히 저·고속의 주행 상태에서 차량이 공기를 빨아들이고 내쉬는 소리를 악보로 그린다. 이를 종합해 최적의 엔진 배기음을 만들기 위해서다. 포르셰의 엔진 배기음은 음악처럼 감미롭다고 해서 ‘노트’(음표 또는 악보)라고 불린다.

포르셰처럼 모든 차종이 전체적으로 비슷한 음색을 가지면서도,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처럼 단번에 알 수 있는 소리를 개발하는 게 현대·기아차 NVH2 리서치랩의 목표다. 박동철 연구위원은 “한 사람의 뛰어난 장인이 자동차를 모두 만든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발생하는 모든 소리가 조화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전띠 미착용 경고음만 듣고도 현대차와 기아차를 구분하도록 말이다. 현대차를 상징하는 소리는 ‘모던 프리미엄’(Modern Premium)이다. 간결하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고급스러움을 드러낸다. 반면 기아차는 ‘디퍼런트 비트(Different Beat)를 주제로 내걸고 역동성을 강조한다. 밝고 경쾌한 소리에 리듬이 더해 젊은 이미지를 구현한다. 안전띠 경고음을 예로 들면 현대차가 ‘땅~ 땅~’, 기아차가 ‘따당따당’ 하는 식이다. 이렇게 개발한 목표음은 앞으로 나오는 새 차에 적용할 예정이다. 현대·기아차의 특성을 살린 소리를 연구·개발하기 위해 NVH2 리서치랩은 LG전자에서 스마트폰 음향을 개발하던 박도영 책임연구원을 2012년 말에 스카우트했다. 그는 휴대전화 문자 알림 소리 ‘문자 왔숑’을 만든 작곡가 출시 사운드디자이너다.

정보와 감성 담는 자동차 소리

자동차 소리를 창조하는 과정은 음악을 작곡·편곡하는 과정과 닮았다. 먼저 소비자의 선호도를 파악해 ‘목표음’을 정한다. 이때 자동차에서 나는 모든 소리를 오선지 악보에 그리는 게 기본이다. 화음의 요소를 살리고 불협화음의 요소를 줄여 최대한 좋은 소리를 뽑아내기 위해서다. 작곡가 출신 연구원이나 청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현대·기아자동차의 소음과 진동을 연구하는 연구개발본부(남양연구소) NVH2 리서치랩 연구원들이 소음진동 실험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의 소음과 진동을 연구하는 연구개발본부(남양연구소) NVH2 리서치랩 연구원들이 소음진동 실험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목표음을 구현하는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운전할 때 발생하는 소음을 줄이는 기술로는 ‘능동제어 소음저감기술’(ANC)이 주목받는다. 항공기·잠수함 등에 쓰이는 첨단 기술로, 일명 ‘소리로 소음을 잡는 기술’이다. 실내에 장착된 센서가 외부 소음을 실시간 모니터링해 문에 달린 스피커로 역파장의 음파를 쏴서 없앤다. 그렇게 해서 주행시 엔진 소음을 10~20데시벨(dB)가량 줄일 수 있다.

오디오로 엔진음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현대·기아차가 국내 최초로 개발해 상용화 테스트 마무리 단계인 주행음 구현기술(ASD) 덕분이다. 예전에는 엔진과 흡배기계 등의 설계를 바꿔야만 엔진음이 달라졌다. 하지만 이제는 엔진 회전수에 맞는 소리를 자동차 스피커로 내보내 기존 엔진음을 보강할 수 있게 됐다. 때로는 자연의 소리를 더하기도 한다. 호랑이 울음소리에서 음향적 특징을 뽑아내 이를 기존 엔진 가속음에 덧입히는 식이다.

새로운 자동차 소리를 만들어낸 뒤에는 다양한 조건에서 수백 번 듣고 수정하는 반복 과정을 밟아야 한다. 1억원이 넘는 NVH 시뮬레이션 기기가 큰 역할을 한다. 평범하게 생긴 책상 아래 설치된 가속페달을 밟으며 핸들을 움직이면 도로 상태, 바람 세기, 속도, 타이어 공기압 등에 따른 자동차 소리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컴퓨터 화면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소리가 생생해 도로를 달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렇게 반복 실험을 거듭하다보면 환청에 시달리는 후유증을 앓기도 한단다.

공들여 만든 소리도 때때로 외면당한다. 소리 호감도가 나라별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방향지시등을 작동할 때 나는 소리의 경우, 우리나라에선 10명 중 8명이 부드러운 소리를 선호한다. 하지만 독일에선 이 소리가 선호도에서 꼴찌를 차지한다. “독일인은 기계음이 가장 고급스럽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인은 덜 자극적인 소리를 좋아한다.”(박동철 연구위원) 엔진음도 유럽에선 적당히 나는 걸 선호하지만 우리나라 소비자는 정숙을 최고의 품질로 꼽는다.

그러나 너무 조용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전기로 움직일 때 엔진음이 거의 없다. 그래서 보행자가 자동차가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해 교통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안전운행을 하려면 가상엔진음(VESS)을 더해야 한다. 속도에 따라 엔진음의 주파수, 소리 등을 적절히 내야 운전자도 주행 속도를 인지하고 무분별하게 과속하지 않는다. 박동철 연구위원의 말이다. “자동차 소리는 정보와 감성을 담는다. 엔진음은 엔진의 상태를 드러내고 동시에 자동차 제조업체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자동차 소리를 개발할 때 진동 소음뿐만 아니라 전자제어, 감성공학,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해야 한다. 그래야 자동차 소음이 소비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소리로 바뀔 수 있다.”

화성(경기도)=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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