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서는 모든 향기가 영원한데, 현실의 향기는 소모되어버린다.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레몬향유, 감귤향, 수선화나 월하향 에센스, 혹은 그 밖의 꽃 향기들은 그냥 공기 속에 방치하면 단 몇 시간만 지나도 벌써 향기가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향수 제조인들은 이러한 숙명적 상황에 맞서기 위해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향기들에 오래 지속되는 향기들을 혼합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향기의 열망에 족쇄를 채워왔다.”(파트리크 쥐스킨트 )
100가지 넘는 향료를 섞어 만들어향기는 바람과 같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 코끝을 스쳐지나갈 뿐, 콧속에 가둬둘 수가 없다. 기억 저편에 묻어뒀다가, 어느 순간 다시 불러내는 게 고작이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으면서 ‘잃어버린 시간’인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말이다.
생활용품 시장에도 ‘향기’라는 바람이 불고 있다. 2012월 12월, 애경이 처음 내놓은 ‘케라시스 퍼퓸 샴푸’가 시작점이다. 찰랑찰랑한 머릿결 집중 관리, 천연샴푸, 탈모를 막는 한방샴푸 등 ‘특별한’ 샴푸들의 유행에 ‘향’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 것이다. 머리카락에 향수를 뿌린 것처럼, 퍼퓸 샴푸는 머리를 감은 뒤 15시간 동안 향이 남는다. 일반 샴푸보다 향이 3배 이상 오래 남는다. 처음 샴푸 뚜껑을 열면, 꽃내음이 확 퍼져올 정도로 향도 진하다. 처음부터 인기를 자신했던 건 아니다. 애경은 그해 5월 케라시스 샴푸 출시 10주년을 기념해 ‘한정판’으로 5만 세트만 선보였다가, 폭발적인 반응이 뒤따르자 12월 정규 제품으로 내놨다. LG생활건강의 ‘엘라스틴 퍼퓸’, 아모레퍼시픽의 ‘미장센 블루밍’ 등 다른 경쟁 퍼퓸 샴푸도 2013년 잇따라 시장에 나왔다. 1년 새 퍼퓸 샴푸는 전체 샴푸시장의 11%(2013년 12월 기준)까지 성장했다. 보디케어, 세제, 섬유유연제 등에도 향을 강조하는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1월21일, 퍼퓸 샴푸의 향기에 ‘족쇄’를 채운 곳을 찾았다. 대전시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애경 중앙연구소다. 연구소 향료개발팀은 초기 연구·개발 단계부터 실제 제품을 내놓기까지 3년여를 퍼퓸 샴푸에 투자했다. 10년 넘게 ‘향’만을 다뤄온 이성숙 책임연구원은 “우리는 조향사들이 만든 향료를 사와서 소비자들이 좋아하고 제품 이미지에 맞게끔 배합하는 ‘향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 퍼퓸 샴푸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은은한 꽃향기’를 기본 바탕으로 한다. 조향사에게 ‘이런 느낌을 원한다’고 주문한 오일 형태의 향료를 받으면, 연구원들은 여기에다 다른 향료를 살짝 첨가하거나 아예 두 향료를 따로 배합해서 새로운 느낌의 향을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9종류가 출시된 퍼퓸 샴푸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러블리 앤 로맨틱’만 하더라도 100가지 넘는 향료를 섞었다. 일반 샴푸보다 2배 많은 향료가 들어간 셈이다.
“향료 수가 많아졌다는 건 이런 뜻이다. 기타 연주와 오케스트라 연주가 있다고 치자. 기타만으로도 좋은 연주일 수는 있지만,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느낌을 따라갈 수는 없다. 많은 향료가 들어갈수록 풍성한 향을 내게 된다.” 신현경 향료개발팀 연구원의 설명이다.
샴푸 용기에 ‘예술’을 가미하다이 때문에 연구원이 되려면, 남다른 후각이 필수다. 이성숙 책임연구원은 “웬만한 향수나 제품의 향은 냄새만 맡아보면 대충 어떤 향료가 배합됐는지 알아맞힐 수 있다. 향기를 오래 기억하는 좋은 방법은, 개인적인 경험이나 사연이랑 연관지어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향은 각자 분명한 개성을 지닌다. 데이지꽃 향기는 수줍은 소녀의 첫사랑을 닮았고, 티아레꽃 향기는 싱그러운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한 느낌이다. 이처럼 향료로 쓰이는 꽃향기만 해도 수백 가지다. 1921년 만들어진 이후 지금도 연간 1억달러 이상 팔리는 ‘샤넬 No.5’에만도 재스민·장미·오리스·은방울꽃·일랑일랑 등의 꽃향기가 담겨 있다. 이 책임연구원은 “퍼퓸 샴푸의 향은 인기 있는 향수를 본떴고, 진짜 향수처럼 수만 번 테스트해서 깊은 향을 남기도록 개발했다”고 덧붙였다.
선천적인 후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향료개발팀 연구실 한쪽 책상 위에는 길이 15cm 남짓한 머리카락이 한 줌씩 묶인 다발 10여 개가 빨래집게로 꽂혀 있다. 인조 머리카락이 아니라 ‘진짜’ 사람 머리카락이다. 잔향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를 실험하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부러 구해왔다. 옆방에는 따로 ‘모발평가실’도 마련돼 있다. 미용실을 그대로 옮겨온 듯 거울·샴푸의자 등이 놓여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연구원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리를 감아본다. 머리만이 아니다. 치약에도 향이 중요하다. 상쾌한 맛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건 민트향이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칫솔질도 하루에 여러 번 한다. 연구실 맞은편에는 세탁실이 있다. 일반 세탁기 3대, 드럼세탁기 2대가 놓여 있다. 세탁 세제의 향을 연구·개발하기 위해 종일 세탁기가 돌아간다. ‘삶은 빨래’ 코스와 ‘일반 빨래’ 코스를 나눠 실험해보고, 빨래 건조 이후의 잔향을 구분해보려면 실내와 야외를 나눠서 빨래를 말려봐야 한다. 세탁기랑 다른 느낌을 경험해보려고 연구원들은 손빨래도 마다하지 않는다. “향은 향료의 배합 비율을 알아보는 기계적인 분석보다, 느낌에 의존하는 관능적인 분석이 중요해서”(이성숙 책임연구원)다. 세제 분말의 독한 냄새에 오래 취해 있던 날은 코피가 쏟아진다.
애경의 퍼퓸 샴푸는 소비자의 코만 아니라 눈도 즐겁게 한다. 샴푸 용기에 ‘예술’을 가미한 것이다. 하얀 원통 모양의 용기 위에는 ‘꽃’이 그려졌다. 그냥 평범한 꽃 그림이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신비롭고 몽환적인 이미지의 꽃 그림은 ‘특별한 제품’이라는 느낌을 더해줬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일러스트 작가인 옐레나 제임스의 그림을 컬래버레이션(공동작업)으로 가져온 덕분이다. 이 작가의 그림을 처음 발견한 디자이너 이하나씨는 “인터넷 검색으로 우리가 원하는 느낌의 작가를 찾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고 귀띔했다.
각종 패키지 디자인대회에서 수상적당한 예술작품을 찾았다고 끝이 아니었다. 서창희 애경디자인센터 부장은 “색깔 농도나 형태 등을 변형시키는 작업을 거쳤다. 꽃이라는 이미지를 표현하려면, 기존의 진부한 그림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몽환적인 느낌이 특별하다는 메시지를 주기에 충분했다”고 말했다. ‘변형’은 용기 색깔과도 맞물려 이뤄졌다. 2013년 여름에 출시된 퍼퓸 샴푸 시즌2에는 시원한 느낌을 주는 파란색을 많이 썼고, 그해 겨울 출시된 시즌3에는 눈과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하얀색과 빨간색을 주로 썼다.
애경은 앞서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와 공동작업해 주방세제인 ‘순샘 버블’ 용기를 내놓은 바 있다. 간결하면서도 곡선을 살린, 기존 주방세제 용기와는 다른 디자인이었다. 이같은 시도는 각종 디자인대회 수상으로 이어졌다. 순샘 버블 용기는 총 5개 디자인대회에서 수상했고, 퍼퓸 샴푸 용기도 국제적인 패키지 디자인 공모전인 ‘펜타워즈’에서 지난해 수상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생활용품에 ‘예술’을 더한다는 전략은 선물세트에서도 통했다. 애경은 지난해 추석을 맞아 메릴린 먼로, 반 고흐 등을 그려넣은 생활용품 선물세트를 선보였다. 비누·샴푸·치약 등이 담긴 선물세트 매출은 매년 3%가량 줄어드는 추세였는데 지난해는 달랐다. 매출이 1년 전보다 55% 성장한 것이다. 서창희 부장은 “뭔가 특별한 제품이라는 느낌을 소비자에게 주는 게 디자인의 힘이다. 오는 3~4월께 카림 라시드와 공동작업한 칫솔도 내놓을 예정이다. 형태가 독특한, 새로운 칫솔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애경이 2007년 디자인 부서를 독립시켜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따로 ‘디자인센터’를 만들었던 결과물이 이제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디자인센터는 기아자동차가 고객에게 선물로 증정하는 향수 용기의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1kg의 장미 향료를 얻으려면 5t 정도의 장미 꽃잎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려면 한 사람이 스무 날 꼬박 장미 꽃잎을 따야 한다(임원철, ). 머리카락 끝에서 덧없이 사라져버릴 향기를 잡아두기 위해, 언젠가는 버려질 제품 용기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애경의 그들도 꼬박 ‘꽃잎’을 따는 중이다.
대전=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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