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무는 시각, 간장 달이는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 간장 달이는 냄새가 마당을 채우고 골목길을 채우고… 누군가 절뚝이며 마을길을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비로소 안다. 아, 그가 제 생을 달이는 중이었구나.”(곽재구, )
‘샘표’ 1954년 등록 국내 최장수 상표간장은 생(生)과 닮았다. 탱글탱글 여문 콩을 푹 삶아 꼭꼭 밟아준다. 많이 으깨지고 문드러져야 한다. 대들보에 매달리거나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한겨울을 나면 곰팡이가 핀다. 메주는 겉은 단단하고 속은 말랑한 게 좋다. 봄이 되어 소금물에 띄운 메주는 햇볕 쬐고, 바람 쐬면서 숙성한다. 뭉근한 불에 간장을 달이면 맛과 향이 더 좋아진다. 수라상에 오를 정도로 감칠맛이 나려면 적어도 5년 이상 묵어야 한다. 인생도, 간장도 묵을수록 좋다.
샘표식품은 간장 달이듯, 뭉근하게 67년을 이어온 발효식품 전문기업이다. 1946년 서울 충무로의 작은 공장에서 간장을 대량생산한 게 시초다. ‘샘표’라는 브랜드는 1954년 등록된 국내 최장수 상표다. 국내에서 간장을 사는 소비자의 절반(올 상반기 시장점유율 48.8%)은 샘표 제품을 선택한다. 경기도 이천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간장은 연간 8만kℓ에 이른다. 간장은 샘표 전체 매출(지난해 2460억원)의 절반가량을 책임지는 ‘효자’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일등’ 간장독이 찰랑이기 시작했다. 소비자는 간장 대신 간편한 소스를 찾고 외식을 즐긴다. 연간 2500억원 규모의 간장 시장은 포화 상태다. 경쟁사인 CJ는 지난 5월 간장 사업에서 아예 철수했다.
똑똑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쏴아아아~, 바람이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 지난 10월8일에 찾은 충북 청원군 오송 생명과학단지에 있는 샘표 연구소 ‘우리발효연구중심’ 1층 한가운데서는, ‘자연의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뽀얗게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메주틀’ 수십 개에 스피커를 달아 만든 미술 작품에서 나는 소리다. 40년 넘게 콩을 품어 곰팡이를 키웠던 나무 메주틀에선 아직도 쿰쿰한 냄새가 났다. “바람과 물에 의해 발효의 맛이 나타나는 과정을 소리에 담았다”(사운드아티스트 김기철)고 한다. 옛날 간장 공장에 있던 굴뚝은 새싹을 담은 화분 조형물로 변신해 정원에 자리잡았다. 지난 5월 개소한 이 연구소에는 샘표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한다. 1층이 과거라면, 색색의 갤러리 형태로 꾸민 회의실과 실험실이 위치한 2·3층은 창의력을 담은 미래다.
미생물 종류에 따라 맛, 향, 색 결정‘연두’는 정확히 그 교차점에 서 있는 제품이다. “우리 맛으로 세계인을 즐겁게 한다는 목표로 전통 장을 연구·개발했고, 한국의 전통 간장을 새롭게 해석한 요리에센스 연두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회사 임직원에게 연두는 제품 그 이상이다. 그동안 쌓아온 기술을 모두 쏟아부었고, 한계에 다다른 기존 시장을 뛰어넘을 ‘미래의 새싹’이다. 연두는 콩을 발효시켜 만든 제품이다. 언뜻 봐선 맑은 간장 같다. 맛도 간장처럼 짭짤하다. 감칠맛을 내기 위해 국이나 나물, 생선구이 등 요리에 넣으면 된다. 하지만 화학조미료는 아니다. 순수하게 콩을 발효시킨 원액에다 채소 진액을 배합했다. 쇠고기·해물 등을 가루 형태로 갈아 만든 다른 천연조미료와도 다르다.
2010년 5월, 연두는 시장에 처음 선보였다. 1세대(미원)-2세대(다시다·감치미)-3세대(산들애·맛선생)를 잇는 ‘4세대 조미료’를 내걸었다. 하지만 소비자가 준 점수는 짰다. 월 1억5천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데 그쳤다. 콩 발효 과정에서 생긴 특유의 냄새에 소비자는 고개를 돌렸다. 샘표는 ‘오감’을 총동원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맛. 연두는 콩만을 발효시켜 만드는 조선간장이 밑바탕이다. 밀을 섞어 단맛을 내는 왜간장(양조간장)과 달리, 발효 과정이 까다롭고 단맛이나 감칠맛, 구수한 맛 등을 내는 것이 쉽지 않다. 샘표는 2001년 조선간장을 국내에 처음 시판하기까지 5년여를 연구·개발에 힘썼다. 조선간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두의 연구·개발에도 그만큼의 품이 들었다.
여기서 잠깐. 간장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뭘까? 곰팡이, 다시 말해 미생물이다. 샘표 연구소 인력 70여 명의 전공은 미생물학, 분자생물학, 식품공학 등이다. 옛날 장맛은 ‘하늘’에 달려 있었다. 햇빛, 바람, 기온, 물 등 자연의 섭리가 중요했다. 사람은 햇볕이 나면 장독 뚜껑을 열어주고, 비가 오면 뚜껑을 닫아주는 ‘정성’만 보태면 됐다. 그러나 일정한 맛으로 대량생산해야 하는 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이재중 연구개발1팀 연구원은 “발효 기술의 핵심은 좋은 미생물을 확보하는 것이다. 미생물의 종류에 따라 맛, 향, 색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농촌진흥청이 전국의 재래 메주 17종의 유전자를 분석했더니 795종의 미생물이 나올 정도로, 발효 과정에서 미생물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샘표식품에 있는 종균실은 이를테면 ‘비밀 장독대’다. 영하 70℃의 종균실 안에는 ‘똘똘한 미생물’들이 수십 년째 보관되고 있다. 장맛 좋다고 유명한 집, 우연히 들른 시골의 허름한 음식점 등에서 얻어온 장에서 분리해낸 미생물들이다. 이재중 연구원은 연구소 한쪽에 놓인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보여주면서 “유명한 집에서 가져온 70년 묵은 간장이 들어 있던 항아리”라고 귀띔했다. 항아리 아래 장식장엔 일본·중국·동남아에서 수집한 수백 가지 발효식품이 가득했다.
어느 종갓집 미생물이 냄새 잡아줘다시 맛 얘기로 돌아와서. 연두는 짜다. 간장이 밑바탕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짭짤하다, 찝찔하다, 짭조름하다, 짭찌레하다, 간간하다… ‘짜다’를 표현하는 우리말이 다양한 만큼, 짠맛도 다양하다. 콩을 삶아 메주로 발효시키면 콩단백질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펩타이드와 아미노산 성분이 추출된다. 아미노산의 종류와 양에 따라, 맛은 달라진다. 샘표 연구원들은 기계로 성분 분석을 해가며 수백 번씩 다른 미생물을 넣는 실험을 했다. 감칠맛이나 깊은 맛을 더하기 위해 양파·생강 등 채소 농축액도 배합하는데, 어떤 채소를 얼마큼 넣을지도 고민이었다. 채소 배합을 맡은 연구개발3팀의 장효순 연구원은 “처음 출시했던 연두에 쇠고기 추출액을 넣었던 걸 아예 빼고 이번엔 식물성 원료만 넣었다. 한식 요리에 맞는 풍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100회 이상 실험을 했다”고 말했다. 어린아이를 둔 주부, 요리에 능숙한 40대 이상의 주부 등을 심층면접해 그때그때 반응을 제품 개발에 반영했다.
냄새. 고구려 사람들의 메주 냄새를 일컬어, 중국인들은 ‘고려취’(高麗臭)라고 불렀다. 그만큼 냄새가 지독했다는 뜻이다. 처음 내놓은 연두가 실패한 주된 원인도 발효취였다. 이재중 연구원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어느 종갓집에서 확보한 미생물이 냄새를 없애준다는 걸 알아냈다. 수백 가지 미생물을 하나하나 다 넣어본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색. 다양한 요리에 연두를 응용하려면 최대한 투명한 색을 띠어야 했다. 실험실에서 60일간 발효시킨 콩 발효액을 색상 측정 기계에 넣어 균질하면서도 맑은 간장 색을 내려고 애썼다.
이처럼 연구원들의 눈, 코, 입을 거쳐서 2012년 4월 연두 리뉴얼 제품을 선보였다. 맛은 더 풍부하고, 향은 더 온화하고, 색은 더 밝아졌다. 연두는 지금까지 200만 병이 팔렸다. 월매출은 10억원으로 이전보다 7배가량 뛰었다. 내년엔 매출 300억원이 목표다. 여기엔 ‘소리’의 힘도 작용했다. 지난해 12월부터 방영된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연두 해요~요리할 땐 모두 연두 해요~’라는 노래가 귀에 착착 감긴 덕분이다. 서연우 마케팅팀 과장은 “소리뿐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느낌이 드는 작고 통통한 제품 용기나 셰프들이 비법을 적는 노트 스케치를 따온 포장 디자인 등 시각적 장치도 신선하다는 반응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발효가 ‘뿌리’라면 연두는 ‘줄기’연두는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스페인 요리과학연구소는 샘표와 손잡고 서양 요리에 연두를 활용하는 법을 연구하고 있고, 세계적인 미식 콘퍼런스에선 셰프들이 연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샘표에 발효가 ‘뿌리’라면, 연두는 세계로 뻗어나갈 새로운 ‘줄기’다.
청원=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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