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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레버리징’은 가능할 것인가

 
등록 2012-09-13 17:14 수정 2020-05-03 04:26
설을 앞둔 2월초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에서 2010년 설 자금 방출이 이뤄지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설을 앞둔 2월초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에서 2010년 설 자금 방출이 이뤄지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화폐란 무엇인가? 좌파·우파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경제학자가 신봉하는 대답은 ‘교환의 매개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무수한 경제행위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지는 교환으로 재화와 서비스가 이동하는 흐름이 있고, 이 흐름을 부드럽게 매개하는 수단인 화폐는 그 역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 세계에서의 무수한 경제적 과정들로 ‘실물’경제가 이루어지면 그것을 거울에 비친 역상으로서의 ‘화폐(및 금융)’경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 전체를 화폐가 마치 하나의 액체처럼 ‘흐른다’는 상상은 이러한 화폐 본질론에 기초하고 있다.

 

화폐, 채권·채무 기록 상징화한 것

한편, 근대 화폐 및 금융 체제의 발달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한 이들이 제시하는 현대 화폐의 정의는 ‘채권과 채무의 기록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실물경제에서의 재화 및 서비스는 채권과 채무의 발생과 소멸에 따라 이동하게 되므로 그 흐름을 결정하는 것이 화폐가 되지만, 화폐 자체는 ‘흐르는’ 액체가 아니다. 무수한 채권자와 채무자들의 장부 위에서 끊임없이 깜빡깜빡 명멸하는 신호일 뿐이다. 따라서 화폐 및 금융 부문은 실물 부문의 흐름에서 찍혀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사회적 상징 작용의 시스템이다.

이 중 어느 쪽이 과연 올바른 화폐의 정의인가는 대답하기 애매한 면이 있다. 화폐라는 게 ‘제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느 쪽의 정의를 선택하고 그것에 따라 제도를 만드는가에 따라 실제로 ‘교환의 매개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채권 채무의 기록 상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844년 영국에서는 화폐란 오로지 국제 상업에서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쓰이는 상품, 즉 황금을 대표하는 증서에 불과하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화폐 이론에 근거해, 영국 내의 통화량을 정확하게 영국 내에 보류돼 있는 황금의 양과 일치시킨다는 무지막지한 은행법이 통과된다. 이른바 고전적 금본위제의 시작이다.

 물론 이 시절에도 상품화폐의 양과 무관한 신용화폐, 즉 단순한 채권·채무의 증표로서의 (유사) 화폐도 대량으로 유통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화폐가 일정량의 황금과 연계돼 있는 금본위제하에서 후자의 팽창은 분명히 일정 한도 내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금융시장이 투기 과열과 거품으로 치닫는 것은 필연적인 경향이며, 이러한 호황시 채권자·채무자의 ‘동반 상승’에 따라 유동성의 과다 발행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적인 경향이다. 하지만 금본위제가 존재해 화폐가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쓰이는 상품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한 이러한 거품이 한없이 커질 수는 없다. 그리고 일단 금본위제가 가하는 통화 기율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과도한 혹은 근거가 없는 채권·채무는 파산이나 상각 등을 거치며 신속히 청산되게 된다. 비록 그 과정은 아주 고통스럽고 심한 사회적 혼란을 수반하게 되지만.

 이러한 국제 금본위제는 비록 미약하나마 1970년대 초까지 최소한의 명맥은 유지해왔다. 하지만 실질적인 ‘달러 본위제’로 이행한 그 이후의 세계 통화 및 금융 체제에서 이제 더 이상 화폐는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서의 상품이 아니다. 비단 기업이나 금융기관들만이 아니라 각급 정부와 가정 경제까지 포함하는 가지가지의 사회적 존재들 사이의 역관계와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발생할 수도 또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는 ‘채권·채무의 기록 상징’으로서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띠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물가, 즉 통화 가치의 안정을 최우선의 정책 목표로 삼는 밀턴 프리드먼 등의 통화주의자들이 그 목적에 빛나는 성과를 올렸던 금본위제의 재건을 반대하고 현재와 같은 변동환율제를 강하게 주장했던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본위 화폐의 발행국인 미국은 통화 기율은커녕 스스로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지구적 경제의 구조를 재편하는 데 달러의 발행과 유통을 능동적인 도구로 활용했다.

 

 

2008년 두발자전거가 쓰러졌다 

 그 과정에서 1990년대 이후 전 지구적으로 전대미문의 ‘부채경제’가 발생했다. 기업·정부·가계·금융 어디라 할 것 없이 이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라는 원리만으로 행동을 하는 행태는 ‘금융화’의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 찌질한 짓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가지가지 형태로 빚을 내어 굴릴 수 있는 총액을 최대한 굴리려 들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신경제니 지구화니 하는 각종 ‘바람’(hype) 속에서 세계경제와 자산시장은 영원히 성장할 수 있으며 예상되는 위험 요소들은 모조리 금융공학과 금융기법으로 할인해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과학처럼 자리잡았다. 그야말로 화폐는 ‘채권과 채무의 기록 상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고, 그야말로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빚더미에 전 지구가 파묻히게 되었다.

 2008년 위기로 잔치가 끝나자 두발자전거는 쓰러졌다. 더 많은 빚을 내어 그 전 빚을 갚는 식의 행태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자 정부·가계·금융기관들은 이제 엄청난 부채에 짓눌려 소비도 투자도 아무것도 하기 힘들게 되었고 산업경제는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 엄청난 부채를 어떻게든 털기 전에는 과감한 투자도 소비의 진작도 불가능해 세계경제는 회복될 수 없다. 이른바 ‘디레버리징’(de-leveraging)이라는, 부채 축소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 청산 과정을 강제하고 가속화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무엇인가? 아직도 국제통화인 달러는 통화 기율은커녕 몇 차례의 양적 완화로 전세계에 넘쳐나 되레 새로운 거품의 위험을 신흥시장국들에 발생시키는 판이다. 지난 몇 년간 아찔한 액수의 부채 위기가 은행이고 국가고 할 것 없이 전세계를 뒤덮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청산된 부채의 소식은 없다. 민간의 부채를 국가의 부채로 넘기고 또 국가의 부채를 다시 민간 부채로 넘겼다가 이를 다시 더 부유한 나라 혹은 국제기구의 부채로 넘기면 이들은 또 이를 회원국의 부채로 넘기는 식으로 일은 진행돼왔다. 요컨대 모두에게 적용되는 통화 기율과 청산의 규칙이 부재한 상태에서 화폐는 순수하게 ‘채권과 채무의 기록 상징’에 불과하게 돼버렸다. 대형 은행과 강대국 등 힘있는 주체들은 계속 부채를 연장하고 이전시켜서 그 청산에 따르는 손실의 상각이나 파산 등의 고통을 피하고 있다. 그 와중에 운 없이 휘말린 힘없는 주체들만 가혹한 청산의 명령에 쓰러진다. 이런 와중이니 과연 언제나 되어야 진짜 디레버리징이 본격적으로 벌어질까. 누리엘 루비니 교수 같은 이는 최소한 5~6년이 지나기 전에는 시작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면 그 몇 년간은 꼼짝없이 지금과 같은 경기침체의 시간이 지속될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 뒤에는 정말로 부채의 청산이 시작될까?

 

부채경제로부터의 탈출 가능할까 

 조세를 걷는 국가와 여러 민간인들 모두가 복잡하게 얽힌, 채권과 채무의 관계를 맺고 있던 고대 수메르 제국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채무가 점점 불어나다 보면 아무도 빚을 갚을 수 없고 또 모두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전체 경제가 마비되는 사태다. 이때 수메르 왕은 강력한 비상조치를 행한다. 그 채권·채무가 기록된 모든 점토판을 한곳에 모아 없애버리는 것이다. 모든 묵은 채무는 청산되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채권·채무 관계가 자라나기 시작하며 경제가 회춘한다. 하지만 이런 비상대권과 같이 전체에게 강제되는 강력한 기율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의 세계경제에서, 과연 부채경제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할 수 있을까?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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