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올 책의 제목을 ‘배리 매닐로’라 지으면 어떻겠느냐 했더니 사람들이 웃는다. 농담만은 아니었는데. 그래, (Even Now)를 부른 팝가수 Barry Manilow 말이다. 이 책은 사변적이지도 전위적이지도 논쟁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그냥 팝이에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상냥하게 쓸쓸한 책이기를 바랍니다, 라는 의미로. 클래식도 프로그레시브록도 힙합도 다 좋다. 그러나 왜 취중 새벽에 위로가 되는 것들은 오래된 팝 발라드나 스탠더드 재즈 같은 부류일까. 왜 그런 노래들을 들을 때면 내가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노래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걸까.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넓게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긴 머리에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프로그레시브록을 좋아하는 히피 유형과 말끔한 옷차림에다 고전음악이 아닌 모든 것을 끔찍하게 여기는 유형으로 말이다. (…) 그러므로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북’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 그것도 여자를 발견한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중단편소설집 (민음사 펴냄)에서 한 인물이 이렇게 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북’에 수록될 만한 노래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적어도 다섯 편 중에서 세 편은 확실히 그렇다.
첫 번째 소설 ‘크루너’는 이제는 한물간 가수 토니 가드너의 이야기. 베네치아의 어느 카페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나’는 왕년의 인기 가수 토니 가드너를 발견하고 설렌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노래를 좋아했어요. 그런 ‘나’에게 토니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한다. 오늘 밤 아내를 위해 객실 가까운 곳에서 선상 공연을 하려 하니 반주를 해줄 수 있겠는가 하고. 밤이 오고, ‘나’의 반주에 맞춰 토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첫 곡은 글렌 캠벨의 1967년 히트곡 (By the time I get to Phoenix).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노랫말이 이렇다.
“피닉스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녀는 깨어나겠지/ 내가 문에 붙여놓은 쪽지를 발견하겠지/ 작별을 고한 부분을 읽고 그녀는 웃겠지/ 전에도 여러 번 그렇게 떠났었으니까// 앨버커키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녀는 일을 하고 있겠지/ 점심시간에 잠시 일손을 놓고 나에게 전화를 걸겠지/ 그러나 벽에 부딪치는 벨 소리만 듣게 되겠지 그뿐이겠지// 오클라호마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녀는 자고 있겠지/ 부드럽게 돌아누워서 내 이름을 부르게 될 거야/ 그리고 그녀는 내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알고 울게 되겠지/ 떠날 거라고 그토록 얘기해왔건만/ 내가 정말 떠날 줄은 몰랐던 거지”
멋진 가사이기는 하지만, 이건 이별 노래가 아닌가. 이 낭만적인 밤에 어째서 이 노래인가. 어쩐 일인지, 아내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말하면서 토니는 울고 노래를 들은 그의 아내도 운다. “27년은 긴 시간이고 이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헤어지기 때문이오.” 어리둥절한 나에게 토니는 말한다. 27년 전 토니는 절정의 가수였고 그녀는 그런 그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선망해서 결혼했다고, 그러나 이제 토니는 한물간 가수가 되었다고,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를 더 늦기 전에 보내줘야 한다고, 토니 자신에게도 재기를 위한 새 출발이 필요하다고. 이런 이별도 있는가? 있다고, 이 소설에 흐르는 음악들이 대신 답한다.
곳곳에서 음악이 흐르는 이 책을, 음악을 들으며 읽는 것과 그냥 읽는 것의 차이는 크다.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말하자면 이 책은 음악 그 자체가 서술자의 역할을 한다. ‘음악 서술자 시점’ 소설이랄까.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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