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와 싸워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로 독재자의 딸이 합법적 대통령이 됐다. 이 사태를 두고 ‘참혹한 아이러니’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어딘가에 적었다. 이제 세계인들은 역사적 아이러니(Historical Irony)의 한 사례로 한국의 18대 대선을 거론할 것이라고. 청년 문재인을 감옥에 집어넣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문재인 같은 이들이 피 흘려 쟁취한 선거제도를 통해, 그 문재인에게 승리하게 된 이 상황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이 있겠느냐고. 그러나 그 글의 끝에서 나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졌다. 진정으로 절망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며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믿지 않으면서도 희망에 대해 적었다. 한 번 더 역사적 아이러니를 기대하자고. 독재자의 딸이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아이러니를.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중략)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외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중략)//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희망이 외롭다 1’에서)
마침 이런 시를 읽었다. 김승희의 새 시집 에 수록돼 있는 작품이다. 굳이 분석 비슷한 것을 해보자면 이렇다. 이 시에서 ‘희망이 외롭다’라는 명제는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 첫째, 희망은 지금 외로운 처지라는 것. 희망이라는 말만 있을 뿐 어디에도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둘째, 희망 때문에 내가 외롭다는 것. 희망 같은 거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마음껏 망가질 수 있을 텐데 희망 때문에 그럴 수도 없어서 내가 외롭다는 것. 요컨대 희망은 주어로서도 외롭고 목적어로서도 외롭다. 공감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두 종류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음껏 절망이라도 해야 살겠다고 말하는 분들과 이럴수록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냉정해지는 분들이 모두 있었다. 나는 전자에 동의하며 후자인 양 글을 썼었다.
또 그러려고 한다. 여전히 참혹한 기분이지만 다시 희망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블랑쇼를 펼친다. 그는 ‘잠들어 있음’과 ‘깨어 있음’ 사이의 관계를 성찰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둘이 모순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블랑쇼는 이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전복한다. “잠은 밤을 가능성으로 변모시킨다. 깨어 있음은 밤이 오면서 잠이 된다. 잠을 자지 않는 자는 깨어 있을 수 없다. 깨어 있음은 항상 깨어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왜냐하면 깨어 있음은 ‘깨어남’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남’이라는 사태를 체험할 수 없다는 것. 잠을 잘 수 있고 또 자는 사람만이 깨어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런 역설이 성립한다. 항상 깨어 있으면 진정으로 깨어날 수 없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예컨대 불면증 환자들은 늘 깨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지금 깨어 있는지 아닌지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장자의 호접몽 속에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이 기나긴 깨어 있음이 사실은 기나긴 잠 속의 무한한 꿈이 아닐까 의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면은 각성의 반대말이 아니다. 전자는 후자의 근거다. 자야만 깨어날 수 있다. 이 통찰을 절망과 희망이라는 짝에다가 적용해보려고 한다. 앞으로 5년 동안 한국 사회가 다시 긴 잠에 빠진다 하더라도, 5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여전히 자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그 5년 동안의 잠 때문에 우리는 깨어남이라는 사건을 처음인 것처럼 확실하게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믿지 않으면서, 나는 쓴다. 희망은 종신형이니까.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쿠팡 손배소 하루새 14명→3천명…“1인당 30만원” 간다

폭설 내리던 4일 밤, TBS는 왜 교통상황을 전하지 못했나
![[속보] 이 대통령, 강형석 농림부 차관 직권면직…“부당 권한 행사” [속보] 이 대통령, 강형석 농림부 차관 직권면직…“부당 권한 행사”](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5/53_17649207902372_9817649204848185.jpg)
[속보] 이 대통령, 강형석 농림부 차관 직권면직…“부당 권한 행사”

우라늄 농축 ‘5대 5 동업’ 하자는 트럼프, 왜?

박나래, 상해 등 혐의로 입건돼…매니저에 갑질 의혹

민주 ‘1인1표제’ 부결…정청래 리더십 휘청

조진웅 ‘소년범 출신’ 의혹 제기…소속사 “사실 확인 중”

양주 14병 털어먹고 신나게 뛰놀더니 화장실서 ‘기절’…어느 라쿤의 ‘불금’

정청래 “1인1표제 재부의 어려워…당원께 송구”

‘한국은 중국 막는 첨병’…미 국가안보전략서 명시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resize/test/child/2025/1205/53_17648924633017_17648924515568_20251204504031.jpg)



